“전쟁터라도 부르시면 달려가 우는 자와 함께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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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라도 부르시면 달려가 우는 자와 함께 할 겁니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1.08.11 1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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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들의 멘토 미 육군 군목(Chaplain) 조희연 목사

“상담학부터 신학까지 공부시키신 이유는 바로 군 선교”
“이민 생활 어려움, 하나님 향한 확신으로 이겨냈어요”

조희연 목사는 40대 중반 늦은 나이에 입대해 군목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그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깨닫는다.
조희연 목사는 40대 중반 늦은 나이에 입대해 군목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그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깨닫는다.

결혼과 출산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한 여성이 40대 중반의 나이에 그것도 미군에 입대하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예장 백석총회 캘리포니아노회에서 안수를 받은 조희연 목사는 지난해 10월 미 육군 군목(Chaplain)으로 공식 임관했다. 하루하루 장병들을 상담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전념하고 있는 조 목사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얼마 전 조희연 목사는 세 자녀와 오랜만에 고국을 찾았다. 지난달 23일 총회본부에서 만난 조 목사는 밝으면서도 차분한 목소리로 지나온 삶과 사역을 차근차근 들려주었다. 긍정의 에너지를 발산하며 내어놓은 간증은 하나님께서 그를 군목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오랫동안 준비해 오셨음을 느끼게 한다. 

공부 퍼즐의 완성은 입대였다
“제가 얼마나 군대에서 행복한지 아세요? 기존에 저를 알던 분들은 군인 신분이 된 저를 상상도 할 수 없을 겁니다. 20대 청년들과 2마일 구보도 같이 하고 있어요. 다양한 병사들을 부대에서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조희연 목사와 가족들은 2009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첫째 딸이 병명을 알 수 없는 질환을 앓을 때 더 나은 의료진을 찾기 위해서였다. 미국에 처음 정착할 때에는 먼저 와 있던 여동생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조 목사 자신이 군대에 입대할 줄을 상상도 못했다. 남동생이 학사장교(ROTC)로 복무했는데도, 정작 본인은 군대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대부분 이민 세대가 그렇듯 이민 초기 경제적 형편은 무척이나 힘겨웠다. 맞벌이를 해도 쉽지 않은데도 하나님께서는 조 목사가 공부할 수 있는 길을 계속 열어주셨다. 숙명여대 중국어과를 졸업해 리더십 대학원을 다니다가 도미했고, 미국에서 가정결혼상담학 석사학위와 심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신학공부까지 마치고는 2018년 봄 노회 때 목사안수까지 받았다. 끊임없이 공부했지만 사실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그 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하나님께 기도로 여쭈었어요. 공부할 기회를 주셨는데, 너무나도 다른 분야들을 공부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냐고요. 뭘 해야 하냐고요. 어디에 쓰시려고 하시는지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 질문의 조각들이 그리고 그 퍼즐의 조각들이 맞춰지는 곳이 바로 군대였습니다.”

조희연 목사(앞줄 오른쪽 네번째)가 함께 임관한 군목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조희연 목사(앞줄 오른쪽 네번째)가 함께 훈련을 받은 동료 군인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핸디캡이 오히려 군목사역 기회
정식 임관한 군목이지만 사실 조희연 목사는 주류 미군 안에서 핸디캡을 가질 수밖에 없다. 늦은 나이 이민으로 일단 영어가 부족하다. 더구나 여성과 아시아인이라는 사실도 편견으로 작용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조 목사는 오히려 이런 핸디캡이 사역에 도움이 된다고 말해주었다.  

“사람들은 군인이라고 하면, 목사라고 하면 상상되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일반적이지 않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다가옵니다. 그렇게 대화를 시작하는 거죠. 20대 장병들은 꿈쩍도 않는 아령을 들려고 끙끙대는 저를 보면서 호기심을 갖고 마음을 열어줍니다.”

일 년도 되지 않은 복무기간에도 수많은 장병들이 조 목사의 사무실을 방문해 울다 갔다. 정서적,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문제들을 자신보다 더 연약해 보이는 조희연 목사에게 풀어놓는다. 그 때 조 목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말해준다. 

“자살충동을 가진 한 병사는 왜 목사님은 여기에 있고 무엇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지 궁금했다면서 교회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병사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약점과 비밀을 털어놓고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께는 이미 당신에게 비전과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려줄 때 변화는 시작됩니다.”

조 목사는 신학을 공부했을 뿐 아니라 상담학과 심리학을 전공했다. 정신건강분야 임상경험도 풍부하다. 모든 경력들이 군목 사역을 하면서 조합되고 발휘되고 있다. 

“지금까지 들어간 엄청난 학비를 생각하면 누군가는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한다고 해요. 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딸이 아프고 정착하느라 힘겨울 때 절박하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법을 배웠고, 고난도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저의 재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때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2천불 벌어도 5천불처럼 살기
이민자가 공부만 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묵묵히 가족들이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감당할 수 있었다. 또 조 목사가 가진 긍정의 에너지가 큰 몫을 했다. 

“딸 셋을 키우면서 맞벌이를 해도 시원찮은데 공부만 하고 있으니 누구는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삶과 사역에 지친 사람들과 달리 늘 웃고 다니니까 ‘공주과’라고 놀리기도 했어요. 하지만 저는 자동차 연료비, 매달 집세를 계속 고민하며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구김이 없으니까 사람들은 시간과 돈이 남아돈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온갖 어려움이 있어도 웃으며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 때문이었다. 옷은 그저 얻어 입고 깨끗이 빨아 입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시장에서 싼 옷을 사 입어도 고급스럽게 보았다. 차가 폐차되었을 때는 공부가 끝나면 늦은 밤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다. 미국에서 여성이 밤 지하철을 탄다는 것은 큰 모험이다. 

“돌이켜보면 폭풍우가 몰아치는 시간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를 ‘태풍의 눈’ 가운데 두셨기 때문에 고요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를 너무 사랑하셔서 가진 것이 없는 고난 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게 하신 거죠.”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한 후배가 “전도사님이 졸업하고는 학교에서 배가 너무 고프다”고 했다. 평소 학교에 갈 때면 국수를 삶아서 음식 하나 더 장만해 동료 학생들과 항상 나눠 먹었다. 하지만 이제 학교에 그렇게 음식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후배의 푸념이었다.

항상 먹을 것은 부족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마다 채우시고 먹이셨고 소탈한 조 목사는 그것을 또 동료 전도사들과 나누었던 것이다. 

“생생한 간증이 너무 많아요. 비록 가족들에게 풍족하게 못해줬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2천불을 벌어도 5천불 버는 것처럼 생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해주셨거든요.”

“전쟁터 파병도 두렵지 않아요”
공부하고 사역을 하면서도 조 목사는 자녀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부족한 시간을 질적 수준으로 높여 활용했다. 항상 자녀들과 함께 즐기기 위한 방법들을 찾았다. 남들처럼 해주지 못했지만 세 딸은 그런 엄마를 이해해주었고, 지금도 최고의 엄마라고 인정해준다. 

“항상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약속을 지켰습니다. 월세가 없을 때에도 울상 짓지 않고 오히려 아이들과 살을 부비고 놀았습니다. 기쁘게 즐겼더니 신뢰가 쌓인 것 같아요. 저는 아이들에게 가족이 가장 우선이고 가치 있는 일에 늘 투자하도록 가르쳐왔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신앙 안에서 잘 자라주어서 조 목사는 감사하다. 큰 아이가 아픈 것도 완치되었고 미국 UC버클리대학(UC Berkeley)에까지 진학했다. 큰 딸은 미국 세라믹박물관에 작품이 전시된 11개주 100명 인재에 뽑히기도 했다. 현재 엄마의 군목 사역을 위한 든든한 후원자이자 동역자가 되어주고 있다. 

군목이면 전쟁터에 파병을 갈 수도 있다. 조희연 목사는 두렵기보다 오히려 파병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곳에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더 급박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란다. 

“막내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자유롭게 파병을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명령이 떨어져도 나갈 것입니다. 저는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는 군목이 될 것을 다짐하고 있어요. 우리 아이들에게도 ‘다운 사람’이 되라고 해요. 제가 군목이란 모자를 썼다면 군인답게 목사답게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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