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대금업은 심각한 죄… 돈을 사랑하는 것 일만 악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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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대금업은 심각한 죄… 돈을 사랑하는 것 일만 악의 뿌리
  • 이상규 교수
  • 승인 2021.07.14 13: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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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초기 기독교 산책 - 재산과 부에 대한 가르침(11)

초기 교회는 부와 재물의 문제를 개인적 차원에서만 생각했지 경제정의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거나 어떤 가르침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예외는 고리대금업(usury)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대하였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초대교회 교부들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이들은, 사랑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고리대금업과 병존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아다나시우스(Athanasius)는 고리대금업은 심각한 죄, 심지어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죄로 보았는데, 암브로스(Ambrose)도 이에 동의하면서, “누군가 고리대금업을 하는 죄를 범하면 이는 도적질하는 것이며 그에게는 생명이 없다”고까지 말했다. 고대 교부들의 이러한 입장은 특별히 가난한 자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이상에서 부가 지니는 양면적 성격과 부의 영적 위험성, 그리고 부에 대한 초기 기독교회의 가르침을 소개하였다. 이런 주제에 대한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정리하면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성찰해 보면 좋겠다. 이미 언급한 바이지만 물질을 지나치게 의존하는 물질주의(Materialism)나 지나치게 부정하는 금욕주의(Asceticism), 이 양자를 규정적으로 형식화하는 바리새적 형식주의(Pharisaism), 이 모두는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되며 따라서 부의 사용에 대한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존 스토트(J. Stott)는, “가난과 부, 그리고 소박한 삶”(Poverty, Wealth and Simplicity)이란 글에서 부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3가지 대안을 제시한 바가 있다. 첫째, 가난하게 되는 것, 둘째, 부한 상태 그대로 있는 것, 셋째, 이웃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소박하고 자족하는 마음을 기르는 일이라고 했다. 존 스토트는 이 3가지 대안 중에서 예수님의 모범과 교훈, 그리고 초대교회적 실천을 따라 세 번째 대안, 곧 부한 자들은 한편으로는 가난한 이들에게 후히 베푸는 마음을, 다른 한편으로는 자족하는 마음과 소박하고도 단순한 삶을 사는 것이 부한 그리스도인이 선택할 수 있는 합당한 대안이라고 제안하였다.

바울은 부자들에 대하여 교훈하면서 ‘이 세대의 부한 자들’이 ‘가난하게 되라’고 말하지 않았고, 또한 그들이 ‘부자인 채로 그냥 있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도리어 바울은 부가 가져올 수 있는 영적 위험들을 지적한 다음 그들의 소유를 가지고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9)고 하였다. 부를 약속하신 의도는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라는 명령이었음을 고려해 볼 때 부유한 채로 있으면서 부를 이기적으로 향유하는 일은 합당한 대안이 될 수 없다.

결국 우리의 최선의 방식은 가난한 이웃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족하는 소박한 삶을 개발하는 것이 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태도일 것이다. 재산이나 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출 15:5, 신 2:19, 욥 41:11, 시 24:1, 50:12). 시편 기자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6장 6~10절의 사도 바울의 자족(自足)에 대한 교훈은 베풀기를 기피하며 부를 독점하는 부자들에게는 경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 한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백석대 석좌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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