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신 ‘꿈’으로 일평생 기독교 문화창달에 혼신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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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신 ‘꿈’으로 일평생 기독교 문화창달에 혼신 다해”
  • 정하라 기자
  • 승인 2021.06.22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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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같은 믿음의 사람 진흥문화(주) 회장 박경진 장로

대한민국 최초 ‘성화 캘린더’ 제작
“기독교 문화” 이 땅에 뿌리 내리기를

처음부터 성공 가도를 달린 사람은 없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성경의 수많은 믿음의 선조가 그리하였듯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꿈을 주시며 꿈을 이루기 위해 혹독한 시련과 역경을 주신다. 그리고 인내함으로 꿈을 이루는 자에게 비로소 열매를 맛보게 하신다. 기독교 문화창달에 평생을 매진해온 진흥문화(주) 회장 박경진 장로(82)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역사를 느끼게 된다.

평생을 기독교 문화창달에 힘써온 진흥문화(주) 회장 박경진 장로는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을 굳게 믿으며 살아왔다. 결국 장애를 극복했고, 가난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평생을 기독교 문화창달에 힘써온 진흥문화(주) 회장 박경진 장로는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을 굳게 믿으며 살아왔다. 결국 장애를 극복했고, 가난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믿는 자에게 능치못함이 없다

1940년, 충남 서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외눈박이’, ‘애꾸눈’이라는 놀림이 늘 그를 따라붙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꺼풀이 올라가지 않는 선천적 장애를 입고 태어났지만, 기독교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을 발견한 그는 기독교 문화창달을 위해 일평생 혼신을 다해왔다. 40여 년 역사의 한국 기독교 문화창달을 주도해온 박경진 장로를 지난 16일 서울 신설동 진흥문화원 사옥에서 만났다.

어쩌면 성경 속 ‘작은 자’와도 같았던 그였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의 안에 잠자고 있는 거인을 깨우는 계기가 됐다. 태어나서부터 가진 장애와 겹쳐진 삶의 굴곡이 없었더라면, 기독교 문화산업의 선두주자로 불리는 그의 인생도 없었을 터. 박경진 장로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말씀을 깨닫게 된 후 지금까지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을 굳게 믿으며 살아왔다. 결국 장애를 극복했고, 가난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며 “태어난 처지를 생각한다면 내 인생은 ‘주제를 뛰어 넘어 꿈’을 이룬 것이고 분수에 넘치는 명예와 복을 받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전했다. 검은 뿔테의 선글라스를 벗어 자신의 눈에 남은 오래된 수술자국을 보여주는 그에게 눈의 상처는 더 이상 흉터가 아닌 인고의 세월, 하나님을 더욱 깊이 경험케 만든 성흔과도 같아 보였다.

‘역경’으로 일군 지난 세월

그가 신앙을 갖게 된 건 6.25 한국 전쟁이 일어난 다음 해 1.4 후퇴에서 피난민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기였다. 고향의 시골 마을 초등학교에서 피난민들이 짐을 쌓아놓고 춥고 배고픈 상황에서도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큰 감동이 되었던 것. 박 장로는 “이렇게 처량하고 배고프고 서러운 환경에서도 어찌 그렇게 절실히 찬양할 수 있는지, 어린 마음에 여기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후 자연스럽게 예배에 참석하면서 신앙을 갖게 됐다”고 고백했다. 믿음 앞에 그의 육신의 장애는 더 이상 그를 가둘만한 장애물이 아니었다. 태어나서부터 소경된 자를 눈 뜨게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자신의 말씀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의 일생에는 두 번의 태어남이 있었다. 1940년 외눈박이 박경진 장로의 탄생이 첫 번째라면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성연교회에서 침례예식으로 세례를 받은 날은 그가 두 번째로 태어난 날이다. “침례예식을 통해 물에 풍덩 빠지는데 과거의 모습을 모두 물 속에 버리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새 사람으로 완전히 태어났다는 확신 앞에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한 열정으로 새벽기도와 철야기도를 하면서 철두철미하게 신앙생활을 했다. 하지만 가난했던 농촌의 일상은 쉽사리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960년대 주경야독으로 일하면서 공부하며 영농책을 보며 새로운 농법에 눈을 뜨게 됐다.

“새벽기도를 해야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생각이 들어 새벽이 되면 늘 냉수마찰을 하고 기도를 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과 주일 아침, 일주일 2번은 반드시 금식했습니다. 그리고나서 당시 살림을 이끌어가던 형수님께 부탁해 금식미를 받아 헌금했습니다. 내 살을 깎은 금식미라고 생각하고 봉헌한 것입니다. 그런 신앙을 갖다 보니 제 신앙생활로 온 동네가 들썩할 정도였습니다.”

이후 그는 서울에서 일하는 동생의 도움으로 이마의 근육을 당겨 눈을 뜨는 수술을 받고 보이지 않던 눈이 0.2의 시력을 갖게 된다. “소경이 눈을 뜨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았던 그의 기도가 마침내 현실로 이뤄진 것이다. 그동안 형님네의 일을 도우며 지내던 그는 23살의 나이에 자립을 하게 됐다. 당시 농촌 사업의 계간사업이 활발하던 때, 그를 눈여겨보던 전도사의 소개로 야산 5000평을 개간해 경작할 경작권을 얻게 된 것이다. 동네 청년 열 댓 명을 몰고 다니면서 계간사업을 펼쳐 3년 동안 야산을 옥토로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27세가 되어서야 뒤늦게 나온 군대 영장으로 그가 일군 기적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당시 결혼도 하고 아기도 있는 상황에 농사 일터도 그대로 두고 나왔는데 장애 때문에 당연히 가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군대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36개월의 군대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경작권은 이미 다른 이에게 넘어간 상황이었으며 가진 것이라곤 맨주먹뿐이었습니다.”

‘성화 캘린더’가 가져다준 기적

그렇게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그는 난곡동 철거민촌을 가족과 함께 전전하며 10년 동안 작은 단칸방에서 25번을 이사할 정도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박 장로는 “쌀가게 점원, 양말 노점부터 건축현장의 노가다, 보따리 장사 안 한 것 없이 고난의 세월 10년을 보냈다. 아내도 모래 나르기를 하면서 살림살이에 힘을 보탰고 경제적으로 가난을 감내하기에 참으로 힘겨운 세월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절실한 상황에서도 새벽기도와 감사헌금은 건너뛰지 않았고, 쌀 한톨도 아껴가며 근면 성실한 삶을 살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는 말씀처럼 그의 성실한 삶을 통해 마침내 열매 맺게 된다. 1979년 종로 3가에 7평의 사무실을 마련해 진흥문화사라는 간판을 걸고 시작한 캘린더 사업이 크게 성공을 거둔 것이다. 1982년 거래처의 특별한 배려로 가게 된 일본 견학을 통해 캘린더 사업에 대한 남다른 비전을 갖게 됐으며, 다음에 유럽 견학을 통해 결단하게 됐다.

“처음 일본의 문화를 경험하고 나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캘린더 사업에 대한 꿈이 생겼고, 다음 해에 빚을 내고 유럽 여행을 결단하게 됐습니다. 3주간 독일, 프랑스, 영국 등 11개국을 돌며 캘린더 사업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했고, 성화와 붓글씨, 성구가 담긴 캘린더를 구상하게 됐습니다. 유럽의 문화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 한국 기독교 문화창달을 위해 혼신을 바쳐 기여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시작할 때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마이너스 인생으로 시작했던 그다. 하지만 유럽에서 기독교 문화사업에 대한 비전을 보고 온 그는 ‘성화 캘린더’로 갑작스럽게 큰 성공을 거두게 됐다. 유럽에서 얻은 안목으로 1984년 뉴 디자인의 캘린더를 제작했는데, 53 만부 주문이라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 낸 것이다. 이는 박 회장에게 캘린더 업계의 돌풍을 일으킨 역사적 사건이자 사업의 급 성장을 이끈 특별한 계기가 됐다. “당시 유럽에서 사온 그림을 화가에게 주고 그림을 다시 그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성화와 붓글씨, 성구를 넣은 캘린더를 구상했습니다. 6장의 성화를 그려 성화 캘린더를 제작했는데, 당시만 해도 그런 캘린더가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캘린더 하나가 가져다준 기적”이라고 하지만, 박 장로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이미 예견된 축복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만한 사건이었다. 처음에는 여직원 하나가 있던 사업이 발전해 진흥빌딩을 세우고, 기독교 용품을 출시해 전국 500여 개의 기독교백화점에 배부됐다”고 전했다.

기독교 문화사업의 선두주자로

팔순을 넘긴 그의 인생은 우리나라 기독교 문화사업의 발전과도 맥이 맞닿아 있다. 90년대는 우리나라의 기독교 문화산업의 전반이 확장되는 큰 전환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이때부터 그는 사업을 확장해 기독교 용품과 팬시문구 생산, 유통업무를 병행했으며, 기독교 용품의 멀티 산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문구업계의 대표기업인 동아연필과 모나미에 OEM 방식으로 납품을 받았고, 뉴 디자인의 기독교 팬시용품을 개발, 국내 500여 기독교백화점에 판매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박 장로는 진흥이라는 브랜드로 캘린더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문화산업의 선두주자로 우뚝 서게 된다.

1989년에는 신설동에 빌딩을 건축했고, 1992년에는 성수동에 공장을 설립했다. 직원도 점점 늘어나 소수가 운영하던 회사에서 100여 명의 사원이 근무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2009년 회사를 분리해 6개의 자회사로 나누어 운영하고 있다. 특히 그는 자신이 받은 것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며 기독교 문화사업을 통해 얻는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일에도 힘쓰고 있다.

박 장로는 진흥문화사 창사 20주년을 맞는 1996년부터 ‘해외입양아초청 모국방문’ 행사를 23년간 계속해 왔다. 이를 통해 입양아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이중문화에서 오는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후원하는 일을 해왔다. 또한 2001년 직원들을 위해 설립한 진흥장학회를 모태로 2010년 진흥장학재단을 발족하고 배우고자 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희망의 등불이 되어주고 있다. 박 장로는 한국 기독교 역사문화를 후세들에게 전하는 일에도 관심이 많다. 한국 기독교 선교 역사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낀 그는 2011년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을 설립했다. 이후 그는 한국 기독교역사자료를 협성대학교에 기증해 학교 내 ‘한국기독교역사자료실(박경진장로기념실)’이 세워졌으며, 박 장로는 공사비 일체를 쾌척했다.

그는 진흥의 지난 40년 역사를 회고하며 “진흥이 한국 기독교 문화 창달이라는 꿈을 안고 시작한 것에 감사한 마음이다. 기독교 문화와 역사가 후세대에도 잘 뿌리내릴 수 있도록 이 사업이 끊임없이 자자손손 이어져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인생의 위기 앞에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을 위한 조언으로 “길은 원래 울퉁불퉁하다. 하지만 내가 오늘 길을 닦고, 내일도 닦아놓으면 다른 사람이 편하다. 나는 그 일을 해왔고 늘 그래왔듯이 또 해갈 것”이라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신앙이 있다면 어려움을 이겨낼 힘이 생긴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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