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국땅의 유학생… 선배이자 친구이자 아버지가 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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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국땅의 유학생… 선배이자 친구이자 아버지가 될게요”
  • 한현구 기자
  • 승인 2021.05.31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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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유학생에게 복음 전하는 웬캄빈 목사

지난 21일 노량진 한국세계선교협의회 본부 사무실에 이주민 사역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KWMA에서 마련한 이주민 선교 분과 종교권별 리더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시작할 시간. 문이 닫히고 차례로 각자의 이름, 그리고 하고 있는 사역에 대해 차분히 소개했다. 익숙한 단어들이 지나는 와중 낯선 이름이 귀를 사로잡았다. “베트남 유학생들을 섬기고 있는 웬캄빈 목사입니다.” 이국적인 이름과는 대조되는 또렷한 발음이었다.

정든 가족을 뒤로 하고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한반도를 밟은 베트남 유학생들에게 웬캄빈 목사는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이방인의 설움을 먼저 겪었던 웬캄빈 목사가 건네는 격려는 주눅 든 학생들의 심금을 울린다. 마음의 문을 연 학생들에게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전한다. 바로 복음이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머나먼 한국 땅에서 유학생들을 섬기고 있는 그의 사연이 궁금했다. 지난 27일 회현동 성도교회에서 웬캄빈 목사를 만나 그의 신앙 여정을 들을 수 있었다.

4대째 이어온 신앙의 뿌리

웬캄빈 목사의 신앙의 뿌리는 누구보다 단단하다. 그는 한국에서도 흔히 찾기 힘든 4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웬 목사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중국에서 선교사를 만나 신앙을 받아들였다.

특히 할아버지의 경우 웬캄빈 목사의 신앙의 모범이다. 할아버지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즉각 선교사와 함께 신학교에서 일했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지금도 106세의 나이로 고향을 지키고 있는 웬 목사의 할아버지는 아직도 프랑스어 성경을 읽으며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계신다. 매일 새벽기도를 드리는 할아버지를 따라 함께 기도의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신앙이 자라왔다고 웬 목사는 전했다.

그가 어렸을 적 출석했던 교회도 할아버지가 베트남 나트랑으로 돌아와 세운 교회였다. 구한말 처음 기독교가 전래됐을 때 그랬듯 베트남에서도 외래종교에 대한 핍박은 비슷했다. 그래도 배척과 핍박 속에 교회는 성장해 열매를 맺었다. 하지만 진짜 시련은 더 나중에 찾아왔다. 민족의 분단과 전쟁, 그리고 공산화였다.

1945년 베트남이 분단되고 북쪽은 공산화가 되면서 북쪽의 교회가 모두 문을 닫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래도 분단 기간엔 그나마 남쪽의 교회들은 자유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75년 공산주의 깃발 아래 베트남이 통일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전국교회가 핍박을 받았고 교회와 신학교는 문을 닫았다. 웬 목사의 할아버지가 세우고 그가 어릴 때부터 신앙을 키워왔던 교회 건물도 그때 파괴됐다.

대학교를 다니기 위해 도시에 나와 있으면서도 고향을 방문해 친척 어린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곤 했습니다. 제가 인도해서 아이들을 모아 성경공부 교실을 열었죠. 신학을 해야겠다, 선교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어요. 무너진 교회를 다시 세우고 싶었고 복음이 필요한 곳에 말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라면을 먹지 않는 이유

신학공부에 대한 꿈을 품고 고민하던 시절. 때마침 한국 선교사 한 명과 연결됐다. 선교사는 질 좋은 신학교육을 받고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으로 한국을 추천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수산경제학과를 전공하며 신학이나 한국에 대해선 전혀 몰랐던 그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그렇게 한국 땅을 밟은 것이 2003. 타국 생활은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서울장신대에서 M.div 과정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언어 습득을 위해 연세대 한국어학당에 다녔다.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고난의 때였다.

제가 한국에서 산 기간만도 16년이 됐어요. 이제는 다른 외국인들이 꺼리는 청국장이나 김치도 즐겨 먹죠. 하지만 유독 라면만은 입에 대지 않습니다. 신학공부를 하던 시절 한 달 내내 모든 끼니를 라면으로 연명했던 혹독한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어서요.”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단체, ISF(국제학생회)와의 만남은 큰 힘이 됐다. 신학 공부를 마치고 서울네이션즈교회에서 베트남 미니스트리를 시작했던 시절, ISF에서 한국어 선생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그때의 인연을 시작으로 ISF에서 훈련을 받고 정식 사역자가 됐다. 웬 목사가 지금처럼 자유롭게 선교하고 사역할 수 있는 것도 ISF의 도움이 컸다.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교제를 나눈 웬캄빈 목사.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교제를 나눈 웬캄빈 목사.

유학생들의 아버지가 되어

지금은 베트남 이주민과 유학생을 위해 교회 공간을 내어준 성도교회에서 협력목사로 사역하며 베트남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다문화 가정 1가정과 근로자 2, 그리고 유학생들이 예배의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 오는 620일이면 성도교회의 베트남 예배인 베트남희망교회를 시작한지 4주년을 맞게 된다.

웬 목사가 명지대에서 베트남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서와 인간이해 과목을 강의하고 있는 터라 학기 중에는 40명이 넘는 학생들이 공간을 채운다. 많게는 60명이 넘는 학생들이 몰려든 적도 있었다. 놀라운 것은 대부분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코로나 시기에 오히려 교회를 찾는 유학생들이 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밖에서 전도를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 먼저 관계를 맺고 집이나 교회로 초대하죠. 초대해서 베트남 음식들을 나누고 한국 생활의 어려움을 들어줘요. 처음엔 조심스럽게 다가갔는데 이젠 어떻게 자연스레 학생들과 친해지고 만날 수 있는지 노하우가 생겼습니다.”

이제 학생들도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웬캄빈 목사를 가장 먼저 찾는다.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보호자로 함께하는 것도 웬 목사다. 혹시 아르바이트를 하며 월급이 밀려 받지 못했을 때는 변호사를 알아봐주고 해결을 돕는다. 몸이 열개라도 모자란 바쁜 일정이지만 도움 받았기에 돕는 것이 당연하다는 웬 목사의 얼굴엔 미소가 만연하다.

 

언어와 문화를 뛰어 넘는 선교

지금은 함께하지만 언제 떠나보내야 할 지 모르는 것이 유학생 사역. 그래서 웬캄빈 목사는 미리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 베트남으로 돌아간 학생들이 고향에 가서 예배를 세우고 예배 인도자로 설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 학생이 돌아간 지역에 예배가 없는 경우 온라인으로 연결해 웬캄빈 목사가 예배 인도를 돕기도 한다.

지금은 베트남에서도 예배의 자유를 인정받고 교단과 교회가 세워졌지만 아직 교단들의 역사와 특색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 철저히 훈련받은 유학생들을 베트남에 보내 예배 인도자로 세우는 비전을 꿈꾸고 있어요. 한국의 뛰어나신 목사님들의 설교를 베트남어로 번역해 녹음하고 베트남 성도들을 위해 보급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다문화 가정과 자녀들을 타깃으로 한 영어교육 사역도 계획 중이다. 모든 이들을 학생으로 받되, 그 중 베트남 어머니와 한국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 가정 자녀에 집중해 관계를 이어가고 복음을 전한다는 구상이다. 아직 오픈까지 2년 정도의 준비기간이 필요하지만 다문화 가정 자녀 3명 정도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는 준비도 마쳤다.

얼굴에 활기만이 가득해 보이는 그에게도 아픔이 있었다. 2016년 우연히 하게 된 건강검진에서 폐암 4기가 발견됐던 것. 갓 태어난 6개월 아이가 있던 웬 목사 부부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건강의 적신호도 웬 목사의 복음전파 열정까지 막지는 못했다.

설교자는 말씀으로 생명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제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 것에 너무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베트남 유학생들의 영혼을 살리고 생명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한국에 있는 유학생들을 돕는 것도 선교라는 마음으로 힘을 실어주셨으면 해요. 문화와 언어와 사고의 장벽을 뛰어 넘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선교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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