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로 피 흘린 교회, 복음의 씨앗으로 꽃 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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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로 피 흘린 교회, 복음의 씨앗으로 꽃 피워
  • 황혜연 목사 주사랑교회 담임, 한국교회역사연구실 대표
  • 승인 2021.05.06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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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교회의 연단기(1936~1955)
황혜연 목사
황혜연 목사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시작한 초대교회는 복음 초기부터 300여 년 동안 박해를 받으며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이러한 고난으로 교회가 굳건한 믿음으로 강화되었으며 순교의 피는 복음의 씨앗이 되어 각 나라에 교회가 세워지는 열매로 나타났다. 

한국 교회도 수용기와 확산기를 거치면서 많은 교회가 세워졌지만, 국가가 처한 어려움과 더불어 교회는 많은 시련을 겪으며 연단기를 맞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신사참배 강요와 6.25 전쟁의 공산당 침략으로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였다. 

일본강점기의 교회 박해 이유는 1919년에 있었던 3·1운동에서 기독교가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는 지도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중에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교회는 1919년 4월 15일에 만세운동 주동자를 대라는 일본군의 협박에 성도들이 굴하지 않자 성도들을 불러 모은 후 못질을 하고 불을 지르고 총격을 가해 23명의 성도들이 순교를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는 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기독교학교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학교를 폐쇄하게 하였고 교회에 대하여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교회는 순응이냐 반대냐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되었고 극심한 박해로 1938년 9월 9일 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를 가결하였다. 이후 교역자들이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 드러내놓고 신사참배를 반대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도 신사참배에 불복하고 끝까지 저항한 목회자와 성도들은 박해를 당하며 순교를 하기까지 이르렀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투옥된 사람은 1945년 해방 때까지 2,000여명에 달했고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고 50여명이 순교를 당했다.

1945년 8월 15일 하나님의 은혜로 감격스러운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고 이념의 갈등으로 남북이 나누어지게 되었다. 남한은 총선거를 실시하여 이승만 장로를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를 구성하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하여 세계에 알렸고 국제 연합의 승인을 받았다. 북한은 소련군이 진주하였고 소련의 지도아래 공산주의 체제를 굳혀 가던 중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독자적인 정치를 시작하였으나 중국과 러시아에서만 국가로 인정을 하였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지원 속에서 남침에 대한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가 1950년 6월 25일 쳐들어와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비극을 맞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교회는 극심한 수난을 당하였고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와 여러 지역을 장악하면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유엔 연합군의 인천상륙으로 불리해진 공산군들이 후퇴하면서 최후의 발악으로 도주에 앞서 교회를 불태우고 성도를 무참하게 학살함으로 순교자를 낸 교회가 상당수였다. 순교자를 낸 교회는 ‘순교신학과 목회’라는 책에 보면 순교자가 2,600명 가량으로 조사되었다. 이러한 순교의 피는 교회가 세워지는 씨앗이 되었고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는 신앙으로 뿌리를 내렸다. 

일본의 강점기와 6.25전쟁으로 국가와 사회와 국민의 삶이 어려웠지만 교회는 고난 속에서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며 소망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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