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원 출신이란 상처, 하나님 만나 ‘자랑’으로 바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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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원 출신이란 상처, 하나님 만나 ‘자랑’으로 바뀌었어요”
  • 김수연 기자
  • 승인 2021.05.0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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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종료청년들의 자립 돕는 ‘브라더스 키퍼’ 김성민 대표
브라더스 키퍼 김성민 대표는 지역사회, 나아가 국가가 보호종료청년들에 대해 좀 더 따뜻한 관심을 기울여주길 당부했다.
브라더스 키퍼 김성민 대표는 지역사회, 나아가 국가가 보호종료청년들에 대해 좀 더 따뜻한 관심을 기울여주길 당부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대개 아이들은 하루빨리 교복을 벗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성인이 되길 갈망한다. 그러나 18세가 되면 선택의 여지없이 홀로 사회에 내던져지는 보호종료청년들의 경우 사정이 다르다. 최소한의 울타리가 돼줬던 보육원을 떠나 고작 몇 백만 원 남짓에 불과한 정착지원금을 들고 세상에 발을 내딛어야 하는 이들은 당장 막막한 생계유지에 걱정부터 앞선다.

그런데 여기, 절벽에 내몰린 보호종료청년들의 아픔을 뼛속 깊이 이해하고 경제적·정서적 자립을 지원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사회적기업 브라더스 키퍼’(Brother’s keeper)의 김성민(안양 열린교회) 대표다. 반평생 보육원에서 힘들게 자라면서 언젠가 부모님을 마주치면 꼭 복수할 요량으로 가슴에 칼을 품고 다녔던 그가 사랑을 꽃피운 계기는 순전히 신앙 덕분이었다고. 지금은 고아라는 말을 상처에서 자랑으로 바꿔가고 있는 김 대표를 만나봤다.

가슴에 칼 버리고 사랑을 품기까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부모가 없다는 사실은 제게 가장 큰 콤플렉스였어요. 제일 괴로웠던 건 제가 태어난 이유, 즉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한 것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잘 압니다. 고통스러웠던 제 과거는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한 과정이었음을요.” 올해로 37세인 김 대표는 실은 아직도 자신이 보육원에 보내진 사연을 모른다. 그저 1988년 경찰기록에 따라 안동국민학교 앞에서 발견, 세 살로 추정이란 단서만 남았을 뿐이다.

그는 그렇게 열여덟 살까지 영문도 모른 채 보육원에서 악몽 같은 나날을 보냈다. 겨우 밥 한 공기 더 먹는 건 상상도 못했고 형 누나들 사이에선 폭행이 수시로 자행됐다. 3명의 교사가 80여 명의 원아를 보듬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보육원 밖에서도 편견은 만연했다. 학교에서 도난사건이라도 발생하면 김 대표를 비롯해 보육원 아이들이 제일 먼저 용의자로 지목됐다. 선생님의 차별과 또래 사이 따돌림은 예삿일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기독교재단 소속 보육원이었기에 매주 의무적으로 예배를 드렸던 그는 하루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교회 선생님의 말에 큰 위로를 얻었다. “유일한 내편이 생겼다는 생각에 기뻤어요. 그래서 형들이 저를 이유 없이 때릴 때마다 속으로 이번 한 번만 안 맞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죠. 그런데 웬걸요. 어김없이 또 주먹이 날아오는 거예요. 그때 배신감이 얼마나 크던지 그 어린 나이에 하늘에 삿대질을 하고 욕을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부모님을 향한 원망도 날로 커졌다. 오죽하면 사춘기였던 중학생 시절 가방에 항상 주방용 칼을 넣어 다닐 정도였다. 길에서 부모님과 우연히라도 스치면 자신을 이토록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만든 데 대해 반드시 보복하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랬던 그가 마음을 바꾼 건 고등학생 1학년 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면서다. 불행으로만 여겼던 지난 세월이 결국은 하나님의 선한 계획과 섭리 안에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당시 보육원으로 교회 청년부가 찾아와 기도회를 열어줬어요. 이 자리에서 목사님이 우리의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절대 주님을 만날 수 없다길래 맘속으로 따졌죠. 죄인이라면 저를 버리고 때린 부모님과 형 누나들, 그리고 그걸 방조한 선생님 아니냐고. 그런데 기도할수록 하나님은 나는 보육원에서 더 심하게 맞으니까 괜찮아라며 학교에서 똑 같이 친구들을 괴롭히는 제 모습이 떠올랐어요. 처음 자각한 저의 죄를 눈물로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김 대표에게 성령님이 역사하시자 그동안의 원망은 순식간에 감사로 바뀌었다. “제가 하나님께 왜 저를 이곳에 보내셨습니까? 왜 이제껏 제 기도는 한 번도 들어주지 않으셨나요?’ 물었어요. 이에 주님이 성민아, 보육원 친구들이 다 네 가족이란다. 이런 경험이 없다면 네가 어찌 네 가족의 심정을 이해하겠니. 대신 나는 단 한 순간도 너를 혼자 내버려둔 적이 없단다라고 위로해주시는데 그제야 하나님이 저를 이곳에 보내셨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내 형제를 지키는 자, 브라더스 키퍼
믿음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갖게 된 그는 더 이상 보육원 출신이란 꼬리표가 부끄럽지 않았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곧 지난날 함께 해주셨던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환경은 여전히 버거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보육원을 나와야 했던 그의 손에 들린 건 겨우 옷가지 몇 점과 달랑 5만 원이 전부였다. 이마저도 형들에게 간신히 빌린 돈이었다. 그렇게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그는 6개월간 노숙생활을 이어갔다.


끔찍했던 보육원 생활도 퇴소의 막막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비단 저뿐만 아니라 모든 보호종료청년들의 현실이죠. 형들은 범죄의 유혹에 빠져 교도소에 가고 누나들은 성매매를 하거나 미혼모가 되기 일쑤였으니까요. 저 역시 상경해서 반년은 공원에서 자고 공중화장실에서 씻고 쓰레기통을 뒤져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히 저는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어둠의 세계에는 절대 발을 들이지 않겠다는 생각이 확고했어요.”

이 역시 주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김 대표는 이후 식당에 취직해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한 푼 두 푼 조금씩 자금이 모이자 더 늦기 전 오랫동안 품어온 을 실현하기로 결심하고 NGO 활동에 뛰어들었다. “이곳에서 7년간 보육원 아이들을 교육하고 퇴소한 친구들을 지원하는 일을 맡았어요. 이는 제가 착해서가 아니라 어려서부터 가족을 갖고 싶다던 바람 때문이었죠. 나이가 들면서는 점차 가족이 돼주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변했고요.”

보육원 아이들을 향한 그의 사랑은 훗날 아내와 단란한 가정을 꾸린 뒤에도 계속됐다. 결혼식 때는 신혼여행도 포기하고 초등학교 운동장을 빌려 4개 보육원 아동들을 초대해, 보육원 출신은 다 전과자가 되는 줄로만 믿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했다. 또 매번 명절엔 옛날의 본인처럼 외로이 지낼 아이들을 불러 아내는 물론 장인장모와 즐거운 추억을 쌓았다.

하지만 6년쯤 됐을 무렵 김 대표는 한계를 느꼈다. 무엇보다 남편이자 가장으로서 정작 아내에게 충실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결국 그는 하나님, 도저히 못하겠습니다라며 사역을 내려놨다. 그리고 3개월 동안 어떤 연락이 와도 받지 않았다. 주님께 반항 아닌 반항을 이어가던 김 대표가 생각을 돌이킨 건 가인과 아벨의 설교를 들으면서다.


성경에서 네 형제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하나님께 동생을 죽인 가인이 모르는 척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Am I my brother’s keeper?) 반문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가인이 꼭 보육원 아이들을 외면하고 성전에 나온 제 모습 같더라고요. 그때 펑펑 울면서 주님, 앞으로 제가 상황이 어떻든 반드시 내 형제를 지키는 자가 되겠습니다. 반드시 브라더스 키퍼(brother’s keeper)를 부르심에 응답하는 소명의 단어로 쓰겠습니다라고 약속했습니다.”

보호종료청년들에게 편견 대신 기대를
한편, 김 대표는 보육원 아이들이 진정한 자립을 이루려면 후원보다 안정적인 일자리 제공이 더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2018년 사회적기업 브라더스 키퍼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 당시 우연한 기회로 벽면녹화를 진행하는 회사에 보육원 출신 친구들을 소개해줬어요. 그중 한 명이 잘 다니기에 이유를 물어보니 식물을 돌보면서 상처가 치유가 됐다는 거예요. 마침 그 회사 사장님이 벽면녹화 기술을 공짜로 전수해줄 테니 사업을 해보라고 제안해서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김 대표가 계획 없이 무조건 OK를 외친 건 아니었다. 여러 전문가와 시장조사 결과 사업성을 충분히 확인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세먼지가 큰 화두로 떠오른 가운데 가뜩이나 조경 산업은 세대교체가 되지 않아 고령화가 심했다. 무엇보다 보육원을 퇴소한 청년들 상당수가 공업·농업 고등학교 졸업생이기에 기술력이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브라더스 키퍼는 벽면녹화와 더불어 보호종료청년들을 위한 교육·금융·법률 등 다각적 지원을 맡고 있다.

브라더스 키퍼 임직원 9명 중 8명은 보호종료청년들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들에게 보육원 출신이란 딱지는 취직뿐만 아니라 결혼 등 어디서나 마이너스 요소거든요. 그래서 우리 회사만큼은 이들을 우대해주기로 했죠. 보육원에서 지낸 모든 시간을 경력으로 인정해주고, 입사해서는 같은 시련을 겪고 회복한 선배들이 후배들의 가장 좋은 멘토가 돼줍니다.”

이 밖에도 브라더스 키퍼는 혁신적인 운영방법으로 눈길을 끈다. 직원들은 서로를 이름이나 직위 대신 식물 이름으로 부른다. 참고로 김 대표의 닉네임은 단란한 가정을 의미하는 꽃말 바비아니. 또한 대표의 월급은 직원의 가장 높은 급여를 절대 넘지 않는다. 이곳은 위계질서가 분명한 보육원과는 다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덕분에 브라더스 키퍼는 그간 괄목할만한 성과를 일궈냈다. 여러 기업체와 공기관 등의 벽면녹화 작업을 활발히 도맡아 10억 원대의 연매출을 기록했다. 보육원 아이들에게 공과금과 생활비 등 경제적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 크리스천 가정에 연결해 멘토링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것도 브라더스 키퍼의 몫이다. 아울러 보호종료청년에 대한 취업 취약계층 인정기간을 5년에서 시설 퇴소 후 만 34세까지 연장하는데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 대표는 회사에 8명의 보호종료청년들이 일하고 있는데 이들이 한 명당 한 보육원을 책임지고 지원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 약 240개의 보육원이 있으니 이 전부를 돌보려면 240명의 직원이 필요하다아울러 두 명이 한 개의 보육원을 책임지면 더 효과적인데 그러려면 480명의 직원이 있어야 한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내고 싶다고 귀띔했다.

이를 위해선 갈 길이 한참 멀다는 김 대표는 브라더스 키퍼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나아가 국가가 좀 더 따뜻한 관심을 기울여주길 당부했다. “저는 보호종료청년들이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살길 소망합니다.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은 결국 언젠가는 고아가 돼요. 다만, 보육원 아이들은 부모와의 헤어짐을 좀 더 먼저 겪은 것뿐이죠. 이들을 향해 편견 대신 기대를 갖는 세상을 만드는데 더욱 힘차게 목소리를 낼 것입니다.”  

브라더스 키퍼 김성민 대표가 직원들인 보호종료청년들과 함께 벽면녹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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