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을 학문이 아닌 삶으로 강조했던 ‘삶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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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을 학문이 아닌 삶으로 강조했던 ‘삶 신학자’
  • 박찬호 교수
  • 승인 2021.04.28 11: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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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 저술, “인격적으로 하나님 알아야”
“신학교 교육과정, 학문적 이슈에 치우쳐 있다” 비판
‘조직신학과 영성의 결혼’ 제안, “영성 없는 신학 무용”
제임스 패커 교수.(사진: heartpublications.co.uk)
제임스 패커 교수.(사진: heartpublications.co.uk)

 

지난달 1 7 일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1926~2020)93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패커의 전기 말미에서 어떤 이들은 패커를 위대한 신학자(theologian)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그 열정을 책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달할 줄 알았던 위대한 삶 신학자’(theologizer)”라고 말하고 있다. 신학자(theologian)라고 하는표현이 신학(theology)을 하는 사람이라는 명사라면 삶 신학자(theologizer)라는 표현은 동사로서 신학(theologizer)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라 할 수 있다.

패 커 는 1 9 2 6 년 영 국 의 글 로 스 터(Gloucester)에서 제임스 퍼시 패커(JamesP e r c y P a c k e r ) 와 도로시 메리 패커(Dorothy Mary Packer) 사이에서 첫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레이트 웨스턴 레일웨이(Great Western Railway)라는 철도 회사의 직원이었으며 어머니는 학교 선생님 출신이었다. 교사로서 패커의 뛰어난 자질은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기독 매체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 독자들은 패커를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 저술가들중 C. S. 루이스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작가로 꼽고 있다. 그의 책은 전 세계적으로 300만부가 팔렸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책을 읽으면서 영적인 은혜와 도전을 받고 있다.

신학 교수로서 패커의 생애 전반부는 영국 브리스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패커는 1955년부터 1961년까지 그리고 1970년부터 1979년까지 브리스톨의 틴 데일 홀과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가르쳤다. 그 중간인 1961년부터 1970년까지 패커는 옥스퍼드의 라티머 하우스의 연구소장으로 재직하였는데 신학 교육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신학적 영향력을 증진시킨 기간이기도 했다.

1979년 패커는 영국을 떠나 캐나다 벤쿠버 리전트 칼리지(Regent College)의 신학 교수로 그의 신학 교육의 후반을 시작하게 된다. 1989년 패커는 리전트 칼리지의 첫 석좌교수인 상우 유통 치(SangwooYoutong Chee) 교수에 취임하였으며 1996년 은퇴 이후에도 2016년 시력을 상실할 때까지 리전트에서 교수 사역을 계속하였다. 이 기간 패커는 캐나다에 거주하였지만 자유롭게 미국을 드나들면서 폭넓은 강연으로 북미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

패커는 많은 사람들에게 칼빈처럼 책 한 권의 사람’(homo unius libri ), 즉 책 한 권만 쓴 사람이라는 뜻이 아닌, 특정의 책 하나로 알려진 사람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칼빈의 경우 그 책이 기독교강요라면, 패커에게 있어서 그 책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 1973)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knowledge about God)과 바로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knowledgeof God)을 구분한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바꿀 수 있는가? 이렇게 하는데 필요한 규칙은 간단하지만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배운 각각의 진리를,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내용으로 바꾸어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198739, 패커는 도쿄 기독신학원(Tokyo Christian Institute)에서 졸업식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패커는 자신의 신학 교수로서 사역에서 겪었던 문제, 즉 신학이 어떻게 신앙을 도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주목했다.

너무나 많은 경우 신학과 기독교적 삶이 따로 노는 것 같다. 많은 신학생들이 신학공부를 마친 다음보다 그 전에 하나님에 대해 더 현실감이 있었다고 말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패커가 볼 때 신학교들이 저지르는 중요한 실수 중 하나는 기독교 신학과 기독교적 삶 사이에 아무런 연관도 맺어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신학교의 교육과정들은 종종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기독교적 삶의 문제보다는 학문적인 이슈들을 다룰 뿐이었다. 신약성경의 책들은 단순히 기독교적 개념들을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만들기 위하여 쓰였던 것이다.”

신학영성의 관계라는 이슈는 패커에게 상당히 중요한 주제였다. 영성(spirituality)이라는 용어가 1970대의 복음주의 저자들이 많이 쓰던 말은 아니었지만, 패커 자신은 기독교적 진리를 삶에 적용시킨다는 청교도적 개념에 가장 가까운 현대적 상응어로 보고, 이 말을 일찍이 1968년부터 사용했다. 패커는 영성이라는 용어보다 영성 신학’(spiritual theology)이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영성 신학은 조직신학을 적용하는 것이며 그것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학문이 될 수는 없다.

패커는 자신의 1989년 리전트 칼러지 치(Chee) 석좌교수 취임기념 강연에서 조직신학적 영성’(systematic spirituality)이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패커는 북미의 개신교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조직신학의 주된 자료가 무엇인지에 대해 두 가지 견해를 소개했다. 조직신학에서 주로 하는 일은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감정과 생각들을 다루는 것이며 이러한 신학에 대한 주관적인 견해는 슐라이어마허로부터 불트만을 거쳐 과정 신학자들까지 지난 200년 동안 서구 신학을 풍미했으며 이에 대해 패커는 명확히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패커가 조직신학의 주된 과제로 제시하고 있는 두 번째 입장은 하나님의 사역과 방법,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계시된 진리를 주해하고 종합하는 것이다. 이 견해는 기독 교회의 주된 흐름과 일치한다. 패커 자신도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패커는 하나님에 대하여 계시된 진리를 단순히 개념화하는 것으로 조직신학의 주된 과제를 삼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냉정하고 초연함(detachment) 가운데 연구되는 다른 과학적인 자료들과 같이 신학 작업이 취급되는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패커는 두 번째 입장에 대해 작지만 중요한(small but significant) 각도 수정을 가하고 있다. 조직신학의 주된 주제는 하나님이며 그러하기에 성경 주해를 할 때의 우리의 마음 자세는 초연함이 아니라 헌신(commitment)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성경을 넘어가는 사변적인 신학의 위험을 피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개념이라는 상자 안에 가두려고 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고, 하나님을 우리 아래 있는 비인격적인 대상인 양 다루려고 하는 부적절한 태도를 피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학 연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되어야 할 요구를 받고 있으며 이러한 요구는 신학은 하나님에 의해 가르쳐지며, 하나님을 가르치며, 우리를 하나님에게 인도한다”(Theologiaa Deo docta, Deum docet, ad Deum ducit )는 아퀴나스의 아름다운 언급에서 실현되고 있다.

자신의 논문의 결론으로써 패커는 조직신학과 영성의 결혼을 제안하고 있다. 조직신학은 우리의 영성의 한 요소로서 실천되어야 하며 우리의 영성은 조직신학의 함축적인 표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윤리학을 그런 시각에서 보고 있다. 그러한 결혼이 이루어질 때 우리가 신학을 하는 것이나 경건하게 탐구하는 것 모두 조직신학적 영성이 될 것이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있어 훈련이 될 것이고 우리 모두는 그 결과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패커는 자신이 제안하고 있는 영성과 조직신학 간 결혼의 실례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건전한 영성은 철두철미하게 삼위일체론 적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교제함에있어서 우리는 세 위격 모두에게 온당한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한다. 성자를 무시하면, 성자의 중보와 속죄, 그리고 천상에서의 간구에 대한 초점을 잃어버리게 되며 타락한 인간의 자연 종교인 율법주의로 떨어지고 만다. 성령을 무시하면, 성령께서 창조하시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우리의 본성의 새롭게 하심, 확신과 기쁨, 그리고 성령께서 부여하시는 능력에 대한 초점을 잃어버리게 되며, 정통주의나 형식주의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성부를 무시하면, 그가 부여하시는 사역과 훈련에 대한 초점을 잃어버리게 되며, 하나님의 가정 안에서 자기 탐닉에만 몰두하는 게으르고 버릇없는 아이가 되고 만다.

패커는 영성이란 하나님과의 교제를 추구, 성취, 배양하고자 하는 제반의 기독교적 활동에 대한 탐구로써, 그 활동에는 공예배, 개인의 기도, 그리고 그러한 경건 활동이 실제적인 기독교적 삶에 미치는 결과들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라는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 이 정의는 진리를 생활에 적용하는 것에 대한 강조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패커가 오랫동안 매우 중요하게 여겨왔던 것이다.

신학을 객관적인 학문의 잣대만을 가지고 접근할 때 신학에서의 진리 주장과 우리 개인의 삶 자체가 괴리될 위험이 늘상 우리에게는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괴리를 정당화하고 자위할 수 있는 학문으로 신학을 하면 신학자들 자신은 편하다. 하지만 그것은 바른 신학을 하는 자세가 아니다. ‘영성으로 표현되지 않는 신학의 무용성을 절감하고 자신의 신학을 모종의 영성을 통해 나타내려는 지난한 몸짓이 우리에게 요청된다. 이런 몸짓은 패커뿐 아니라 이전 세대의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요 또 마땅한 것이었다. 이런 몸부림이 없을 때 우리는 학문만으로의 신학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요 모름지기 이런 몸부림이 있을 때 우리는 신학이 학문이 아니다는 말에 가슴 깊이 공감하고 패커와 같이 단지 신학자가 아니라 삶 신학자로 살아갈 결단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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