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과 학교 세운 교회, 유익한 종교로 인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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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과 학교 세운 교회, 유익한 종교로 인식됐다”
  • 이인창
  • 승인 2021.04.28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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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역사를 통해서 보는 한국교회의 전망 ⓷ 복음의 수용기 (1885~1905)
황혜연 목사
황혜연 목사

복음의 수용기는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시점의 역사를 규정하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 개신교의 수용과정은 구미제국의 동양진출과 시기를 같이한다. 중국과 일본은 문호를 개방하여 서방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기독교 선교사가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1882년 5월 22일 조·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선의 개화파들은 근대국가의 수립 방략으로 서양의 과학기술, 정치제도, 서도(기독교)를 수용하자는 입장이었다. 맥클레이(Robert Samuel Maclay 미국 감리교 선교본부감독)는 김옥균(외무협판)을 통해 1884년 7월 선교회가 병원사업과 교육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고종 황제의 윤허를 받아냈다. 포교의 자유를 허락한다는 내용은 없었으나 은둔의 땅 조선에 복음을 수용하는 배경이 되었다. 

알렌(H. N. Allen, 안연安連, 1858~1932)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상하이에 있다가 고종 황제의 허락을 받고 1884년 9월 22일 들어왔다. 이어서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와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선교사는 공식 선교사 파송을 받고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항을 통해 들어왔다. 이들을 통해 기독교 복음은 활기를 띄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웠다. 당시 한국은 의료 후진국으로 장질부사나 콜레라 등의 전염병과 각종 질병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출생아 셋 중 하나는 네 살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고 넷 중 하나는 첫돌조차 맞이하지 못했다. 세계 제일의 한글을 소유한 나라임에도 글을 아는 사람이 몇 안 되는 문맹국으로 학교라고는 동네 서당이 전부인 곳이 많았다. 선교사들은 이런 점을 착안해 의료선교와 함께 학교를 세우고 교육중심의 선교활동을 하였다. 

1887년 한국 감리교 의료선교를 담당하고 있던 스크랜튼(Mary Scranton, 1832∼1909)은 한국여성들이 남자의사 앞에 몸을 보일 수 없는 관행을 보고 미국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부에 병원설립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병원 설립안이 승인되어, 1887년 10월 여의사 하워드(Meta Howard, 1862-1930)가 한국으로 건너와 정동에 위치한 이화학당 구내에서 여성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에는 알렌이 운영하는 광혜원과 스크랜튼이 운영하는 정동병원이 있었으나, 여자들은 하워드가 운영하는 보구여관에서 별도로 치료를 받았다. 그녀는 이곳에서 2,560여 명의 여성환자를 치료했으나 과로로 건강을 해쳐 미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하워드의 후임으로 1890년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1865~1951)이 내한하여 병원을 돌보았으며 10개월 동안 2,500여 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선교사들은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웠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경신학교(연희전문학교를 거쳐 오늘의 연세대학교)와 새문안 교회를 세웠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과 정동교회를 세웠다. 그 이후 1907년 기독교 학교 수는 542개나 되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공적에 의해 기독교는 백성에게 유익을 주는 종교로 인식되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복음을 수용하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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