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정의감, 폭로의 욕구로 변질… 나의 죄성부터 돌아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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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정의감, 폭로의 욕구로 변질… 나의 죄성부터 돌아봐야
  • 유선명 교수
  • 승인 2021.04.27 1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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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명 교수의 전도서이야기(16) -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전 7:22)

태어난 곳에서 멀리 떠나지 않고 익숙한 사람들 곁에서 평생을 살았던 옛 시대와 달리, 오늘날 우리는 전 세계 어디든 하루 안에 닿을 수 있고 통신망에 의해 세계와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살아갑니다. 

마을에 하나뿐인 동네 슈퍼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던 시대와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세계 구석구석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배달시킬 수 있는 시대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비교할 수 없이 늘어난 선택의 가능성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선택의 의지를 약화시킵니다. 수십 가지 메뉴를 자랑하는 뷔페식당에서 오히려 더 질려 하고, 수백 개 케이블 채널이 있지만 티브이 채널이 셋 밖에 없었을 때보다도 더 자주 계속 채널을 바꾸며 볼 게 없다고 불평하는 우리 모습은 이 선택권의 역설을 잘 보여줍니다. 

지식과 정보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우리 눈앞에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양의 출판물과 인터넷 기사가 주어지지만, 막상 양질의 정보를 얻고 사안을 정리하기는 더 어려워져가는 듯합니다. 이제는 채움보다 비움을, 모음보다 버림을 소중히 여길 때가 된 듯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에 주어진 선택지들 속에서 내 통제권을 고집하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들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자세가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혜는 올바른 판단과 선택의 능력이라고 이해됩니다. 조금 더 시적으로 삶의 기술 혹은 통제력이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해의 바탕에는 인생의 고비에서 내리는 선택과 결정은 스스로의 몫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물론 중대한 결정을 남에게 내맡기는 피동성보다는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능동성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덕목이 그렇듯이 능동성도 적절한 맥락 안에서만 뜻이 있습니다. 전도서는 삶에서 크나큰 의미를 갖는 사건과 계기들이 종종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우리는 삶의 피동성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피동성은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될 대로 되라고 하는 무책임함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손길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겸손함입니다.

전도서 7장 20~22절은 이러한 마음가짐의 한 예를 보여줍니다. 개역개정은 20절을 “없기 때문이로다”로 번역해 19절에 연결시키지만, 원문은 20절을 21절로 이어서 “완벽한 의인이란 없는 법이니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말아라.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은 듣지 않는 편이 낫다”로 이해해도 좋습니다. 듣지 말 것을, 알려하지 말 것을, 만나지 말 것을… 하는 후회를 해보셨다면 이 말씀의 뜻을 곧바로 이해하실 것입니다. 

마주 앉은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겠지요. 그러나 가까운 친구, 가족, 배우자의 마음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우리가 더 행복해질까요? “남들이 하는 말에 일일이 마음을 쓰지 말라”(새번역수정) 혹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다 들으려고 하지 말아라(현대인의성경).” 댓글과 좋아요, 고객평가에 목매고 SNS의 홍수에 휩쓸리는 이 세대를 향한 너무나 21세기적인 조언입니다. 그런데 “계획된 무심함”이라 할 만한 이 태도가 일희일비를 피하기 위한 현실감에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죄성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는 데 전도서 말씀의 특별함이 있습니다: “너 또한 남을 욕한 일이 많다는 것을 너 스스로 잘 알고 있다(새번역).” 정의감이 과도해질 수 있듯이(전 7:16), 진실성의 추구 또한 폭로의 욕구로 변질될 수 있기에, 듣지 않기를, 보지 않기를 택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깨끗이 씻었어도 여전히 옷을 입고 화장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백석대 교수·구약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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