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믿음의 삶을 다룬 규범들, 오늘날까지 열매로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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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믿음의 삶을 다룬 규범들, 오늘날까지 열매로 이어져
  • 장종현 목사
  • 승인 2021.03.30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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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현 목사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강해(12)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
장종현 총회장
장종현 총회장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 가운데 율법 관련 내용의 비중이 높은 것은 웨스트민스터 표준서들 작성 당시 신학자들 대부분이 언약을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맺은 언약을 타락 전에 맺은 행위언약과 타락 후에 맺은 은혜언약으로 구분하는 이중언약 체계는 웨스트민스터 표준서들, 즉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 전체를 구성하는 뼈대였다.

웨스트민스터 표준서들이 작성된 17세기 중엽 영국에서 도덕법 논쟁이 있었다. 신약시대 신자들에게는 도덕법, 즉 율법이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는 반율법주의자들과 신약시대 신자들 역시 율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는 청교도 주류 사이에 오랜 기간에 걸쳐 전개된 논쟁이었다. 반율법주의자들은 칭의와 성화를 혼동해서 단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칭의에 속하는 완전의 특성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성화에 그릇 적용하는 잘못을 범했다.

이에 반해 청교도 주류는 행위언약은 물론이고 은혜언약도 비록 그 기초와 확립에 있어서는 무조건적이나 그 책무는 조건적이라고 가르쳤다. 은혜언약에 있어서 신자의 책무는 바로 믿음을 가짐과 더불어 믿음에 어울리는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며, 그러한 삶의 지침이 바로 율법인 것이다. 청교도의 이런 율법관은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강조한 율법의 제3 용도, 즉 신자의 삶의 규범으로서의 용도와 같은 맥락에 있으며, 동시대 대륙의 개혁신학자들의 율법관과 동일한 것이었다.

소요리문답 23-26문에서는 그리스도의 3중직 교리를 다루고 있다. 역시 칼빈의 영향이 현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또한 57-62문에서는 안식일 규정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59문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 주간의 첫날이 안식일이 되었음을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칼빈주의적 특징과 청교도적 특징을 함께 가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영어권의 칼빈주의 장로교회들과 회중교회들 거의 전부가 사용했으며, 여러 다른 언어들로 번역되어 사용했다. 마틴 루터의 소요리문답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더불어 가장 널리 사용된 요리문답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까닭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성경을 체계적으로 요약한 탁월한 교육 도구이기 때문이다. 청교도 목회자인 리차드 백스터는 소요리문답을 가리켜서 “가장 좋은 요리문답이며, 기독교신앙과 교리에 대한 가장 휼륭한 요약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소요리문답의 첫 질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소요리문답은 놀라운 답을 준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에 대한 표현 가운데 이보다 더 간결하고 힘찬 것은 없을 것이다. 소요리문답의 모든 내용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이룰 수 있는가?’를 질의하고 답한다.

1907년 우리나라 장로교회 설립 당시 독노회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교회문답서로 채택한다고 천명했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 장로교회의 다수가 여전히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교회의 표준 문서로 사용하고 있다. 16세기 중엽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당시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시대에 매이지 않는 진리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을 매우 잘 추출해 내어 문답으로 만들었기에 오늘날까지도 신자 교육에 애용하고 있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목표는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내의 교회들에게 가능한 한 가장 일치된 교회 조직 체계, 예배, 신앙고백을 주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총회는 이루었는가? 답은 “예”이기도 하고 “아니다”이기도 하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성경적 교리와 개혁주의신학의 표준을 담은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제공했다. 그러나 영국에서 장로교 제도로 국가 교회는 세우는 일은 의회의 동의까지 끌어냈지만 성공치 못했다. 영국교회를 완전히 개혁주의적으로 세우는 일도, 또 많은 영향을 미치고 변호를 이루는 일도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과물들은 영국을 넘어 스코틀랜드와 유럽으로, 신대륙과 아시아, 아프리카로 건너가 지금도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174명의 총회 대표들이 5년 6개월 22일 동안 기도하며 수고했던 노력들은 헛되지 않았다. 그들은 칼빈이 말한 것처럼 “알곡이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번식하도록 지켜주는 종자”를 심을 가장 좋은 도구를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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