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십자가만 붙들고 온 33년, ‘세계 복음화’ 밀알이 되다
상태바
주님의 십자가만 붙들고 온 33년, ‘세계 복음화’ 밀알이 되다
  • 대전=이현주 기자
  • 승인 2021.03.17 14:36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창고에서 세계 8개 나라 선교하는 교회로 부흥한 ‘대전 평강교회’

교회 없는 동네 찾아 대전까지…복수동 첫 교회
1988년 개척 후 돼지막사 교회까지 고난의 여정
16년 만에 입당한 새성전에서 부흥 역사 나타나
해외 48곳, 국내 12개 교회 건축 후원하며 선교
교회 벽면 가득 선교 흔적, 지역사회 섬김도 활발

이강재 목사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소명을 따라 평강교회를 개척하고 33년 동안 목회하고 있다. 특별히 국내외 선교 사역에 대한 열정이 뜨겁다.
이강재 목사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소명을 따라 평강교회를 개척하고 33년 동안 목회하고 있다. 특별히 국내외 선교 사역에 대한 열정이 뜨겁다.

“모든 사람을 제자 삼아, 교회를 세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된다!”

대전광역시 서구 복수동에 위치한 평강교회(담임:이강재 목사)의 슬로건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 그 복음으로 다시 세상을 변화시킨다. 평강교회 성도들은 이강재 담임목사와 함께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나서고 있다. 무엇보다 세계 곳곳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 교회 벽에 빼곡하게 붙어 있는 교회 사진은 평강교회 선교의 열매들이다. 선교하는 교회로 복음의 지경을 넓혀가는 평강교회를 찾아가 부흥과 선교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교회가 없는 곳 찾아 대전으로
1988년 교회가 없는 곳을 찾아다닌 한 청년은 아무 연고도 없는 대전까지 내려왔다. ‘가난한 동네, 교회가 없는 곳.’ 개척을 위해 기도하던 이강재 목사에게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이 두 가지였다. “이 동네에 교회가 있습니까?” 가는 곳마다 그가 던진 질문은 교회가 있느냐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찾은 곳이 바로 ‘복수동’이다. 평강교회는 복수동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다. “왜 하필 이런 데 교회를 세우냐”는 걱정과 질책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단호했다. ‘이곳이 바로 주님이 영혼을 사랑하시는 곳’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동네 뒷산에 올라가 마을을 바라보니 한 가운데 다 쓰러져가는 창고가 보였다. 그곳을 보며 손을 들어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여, 이 지역의 영혼들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저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하옵소서!” 마음은 뜨거워졌고, 용기가 솟았다. 다짜고짜 창고를 수소문하여 세를 요청했다. 한주 두주가 지나도 허락을 얻어내지 못했다. ‘교회가 왠말이냐’며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7주 동안 기도하며 찾아가기를 반복했다. 결국 8평의 허물어져가는 창고를 예배당으로 얻을 수 있었다.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곳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기도하며 믿음으로 계속 두드렸더니 문이 열리더군요. 불교와 오랜 샤머니즘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주시는 분이십니다.”

8평 창고에서 시작한 첫 예배당.
8평 창고에서 시작한 첫 예배당.

직장 버리고 개척에 뛰어 들다
이강재 목사는 보너스가 1000%나 되는 꿈의 직장에서 7년 6개월을 근무했다. 담배인삼공사 전신인 전매청이 그의 직장이었다. 천안 인쇄창에서 근무할 때 그는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기차를 타고 서울 방배동까지 와서 백석신학에서 공부했다. 사실 그는 가장으로, 아버지로 안정되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큰 딸도 막 태어났던 터라 개척에 뛰어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주변에서 걱정이 더 컸다. 

“부모님도 형제들도 왜 그 좋은 직장을 그만 두냐고 저를 설득했죠. 직장 동료들도 사표를 만류했습니다. 안정된 직장과 꼬박꼬박 들어오는 급여를 내려놓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시각에서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개척에 대한 열망이 솟아나는데 정말 견딜 수 없었어요. 주님이 계신데 왜 걱정하겠습니까? 주님은 저의 직장보다 크신 분이고, 주님이 먹이고 입혀주시는 것이 제 급여보다 더 크시기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사표를 낼 수 있었죠.”

‘주님이 나의 전부’라는 고백으로 뛰어든 개척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교회가 8평 창고였으니 참 볼품없는 시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감사를 고백했다. ‘주여, 이 작은 마을에 영적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반드시 이 곳이 믿음의 도성이 되게 하옵소서! 세계 복음화를 이루는 작은 밀알이 되게 하옵소서!’ 그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돼지막사가 교회로, 고난의 여정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목회에 뛰어들어도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세상에서는 일한만큼 대가를 받지만 영적인 결과물은 사람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때가 도래할 때까지 무수한 시련과 고난이 그 앞을 가로막기도 한다. 
평강교회 이강재 목사도 마찬가지였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다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하고, 귀신 들린 자와 마주하고,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동분서주해도 정착하는 성도는 많지 않았다. 개척하고 5년이 지나도록 창고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성도는 20명 남짓 모였다. 그렇다고 계속 창고에 있을 수도 없었다. 

새로운 성전 부지를 찾아 기도했다. 그때 돼지 막사를 판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일단 계약을 했지만 3개월은 돼지를 계속 키우는 조건이었다. 막사 절반에서 예배를 드리고 절반은 돼지를 키우는 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이강재 목사와 성도들은 직접 막사를 수리했다. 지붕을 뒤덮은 3겹의 보온 덮개를 걷어냈다. 악취가 진동했다. 천장을 올리고 페인트를 칠했다. 남자라고는 둘밖에 없는 교회에서 5개월 넘게 개조작업이 진행됐다. 비록 돼지를 기르던 곳이었지만 평강교회 성도들에게는 ‘주님의 궁궐’이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예배를 드릴 때 성도들은 돼지 냄새를 맡지 못했다. 돼지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돼지 막사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은혜가 넘쳤어요. 낮이나 저녁이나 80명이 넘는 성도들이 예배를 드렸고, 100명까지 부흥했죠. 그때 시험이 닥쳤습니다.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부지를 매입하기 시작했는데 성도들이 파당을 지어 반대했습니다. 그때 갈등으로 건축이 중단됐습니다. 사랑하는 큰 딸은 뇌종양 판정을 받았어요. 하나님이 데려가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개척하면서 고생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강재 목사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조금씩 부지를 매입하고 건축을 시작했다. 2004년 교회를 개척한지 약 16년 만에 새성전에 입당했다. 2010년에 교육관 부지를 매입했다. 지역도 함께 발전하여 젊은 가정들이 모여들었다. 다음세대를 세우는 교회가 되기 위해 ‘꿈샘관’을 건축했다. 딸아이는 두개골을 절개하는 수술 대신 약물 치료를 선택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은 건강한 모습으로 가정을 꾸리고 직장생활도 하고 있다. 

성전 입당 후 시작된 선교
새성전 입당 후에는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첫 선교지는 중국이었다. 내몽고와 중국 남방 지역에 교회를 세웠다. 2008년부터는 인도 선교로 방향을 바꿨다. 인도교회연합회와 손을 잡고 건축이 중단된 교회들을 도왔다. 7년을 지어도 완공을 못한 교회도 있었다. 여건이 되는대로 도왔다. 다마람, 디오세, 무데스오람, 샤푸람교회 등 평강교회가 성전건축을 도운 곳이 40개가 넘는다. 7년 동안 완공할 수 없었던 천민지역 교회는 평강교회의 지원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평강처치’라고 간판을 달았다. 감동받은 평강교회 성도들은 대리석으로 예배당 실내 인테리어를 후원했다. 교회를 개척하기보다 현지인 교회 건축을 도와주는 평강교회의 선교방식은 매우 독특했다. 

이강재 목사는 “돼지막사 교회에서 힘들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성전을 세우는 것에 특별한 사명이 있다. 예배할 수 있는 성전을 건축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또 어느 나라건 성전이 지어지고 나면 성도들이 모여든다. 인도에 성전을 지어주고 2~3년이 지나면 성도가 배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며 “국내외를 막론하고 건축이 중단된 곳에 지원하는 것이 선교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평강교회 1층 벽면에는 인도에 건축한 교회들과 초교파적으로 지원한 국내 성전 건축 사진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목사와 평신도 선교사를 포함해 마다가스카르, 태국, 세네갈, 인도, 이집트, 필리핀, 헝가리 등에 선교사를 파송했고, 전라남도 노화도 선교도 하고 있다. 국내 리모델링 교회만 12곳, 2009년부터 12년째 해외에 48개 교회 건축을 후원했다. 

대전 평강교회 외관.
대전 평강교회 외관.

금요기도회는 부흥의 근원
지역사회 선교도 활발하다. 교육관인 꿈샘관은 카페와 블록방을 갖추고 있다. 카페 수입은 해외선교를 위해 사용되고, 꿈샘관에서 진행되는 아기학교와 블록방은 지역의 젊은 가정을 전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운영이 중단됐지만 아이들의 교육을 통해 부모에게 복음의 접촉점을 만들어 다음세대를 복음화 하는 일에 앞장설 예정이다. 

코로나 중에도 선교는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선교사 20명 파송을 목표로 최소 100교회 이상 건축 후원에 나서고자 한다. 실제 선교 현장에서 교회가 지어진 모습을 본 성도들은 더 열정적으로 선교에 참여한다. 태국에는 ‘평강마을’을 조성하고 태권도 선교를 시작하고자 기도하고 있다. 
목회에 한계를 느낄 즈음 코칭을 통해 도움을 받았던 이 목사는 매주 후배 목회자들을 위해 코칭훈련을 무료로 진행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도 뭔가 특별한 부흥의 비결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정답은 ‘금요기도회’였다. 

“우리는 금요기도회를 뜨겁게 합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진액을 빼면 진짜 뼈에 바람이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만큼 열심히 기도하면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치유 받고 인생이 달라지는 체험을 하게 되죠. 그래서 저는 금요기도회 전에 2시간 먼저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역사하세요.”

낯선 대전에 정착한지 33년째다. 숱한 고난의 역사 위에 평강교회가 세워졌다. 30년 넘도록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강재 담임목사의 목회철학이다. ‘거듭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주는 교회’. 신학교 3학년 때 하나님 앞에 약속한 목회철학을 그는 지금까지 지켜내고 있다. 성도들과 함께 ‘선교하는 교회’로 하나님의 평강을 온 세상에 펼쳐 나가고 있다. 대전= 이현주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백경진 2021-03-18 01:41:06
목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