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 교리문답에 포함시키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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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 교리문답에 포함시키지 않아
  • 장종현 목사(백석학원 설립자)
  • 승인 2021.03.16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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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현 목사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강해(10)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
장종현 총회장
장종현 목사

칼빈의 교리문답 내용은 논리적이고 좋으나 질문들이 연결되어 있고 수가 많아 기억하기에 매우 어렵다. 총회 당시에 스코틀랜드에서 인기가 있었던 6개의 교리문답들도 대동소이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은 각각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은 각각의 문제와 답이 독립되어 기억하기에 매우 편리하게 구성되어 있다. 총회에는 당대에 교리문답의 전문가들이 모였기에 그들은 이전 저술들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번에 좀 더 완벽한 교리문답을 만들기를 희망했다. 또한 여러 교리문답들을 선택하여 사용하다 보니 무엇을 사용하는가에 따라 각각 가르침이 달랐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대표들은 변화된 교회 체제 안에서 영국 상황에 적절한, 좀 더 완전하고 정확하며, 통일된 교리문답을 만들기를 원하였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서 준비는 1643년 12월에 공중예배 지침서 작성을 위한 위원회가 임명되면서 시작되었다. 총회는 허머트 팔머에게 먼저 교리문답 초고를 작성하도록 요청했다. 캠브리지의 퀸스칼리지 교수인 허버트 팔머는 능력이 출중하고 매우 경건한 학자로 그 시대에 ‘영국 내에서 가장 탁월한 교리문답 교수’로 평가받았다. 그것은 총회 이전에 교리문답을 출간한데다 또 지력이 매우 약한 자들조차도 교리를 쉽게 기억하도록 질의와 응답의 기술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팔머는 교리문답의 표현은 간결한 것이 좋다고 생각했으나 스코틀랜드 대표들은 좀 더 자세하지 않은 것에 실망감을 표현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이미 사용하는 교리문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총회는 스코틀랜드 대표들에게 초고를 넘겨 수정하게 했다.

1644년이 끝날 무렵까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주된 안건은 교회 정치체제, 성직자 안수와 예배모범에 대한 문제였다. 이런 문제들을 토론했을 때 여러 가지 의견들로 인해 진행이 지체되었고, 1645년 5월까지 속도를 내지 못했다. 1644년 8월 20일에는 신앙고백서 제정위원회를 만들었다. 1645년 2월 7일에 교리문답 위원회가 발족되었고 팔머의 수정된 초고로 활동을 시작했다. 논쟁이 될 내용에 대해서는 자주 총회의 견해를 묻고 공개 토론을 했다.

그 와중에 1646년 12월, 신앙고백이 먼저 작성되었다. 그러나 교리문답은 1647년 1월까지도 여러 가지 목적과 용도에 맞는 것을 내려고 노력하다 보니 속도를 내지 못했다. 신학자 리차드 바인스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성된 신앙고백에 근거하는 두 개의 교리문답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의 발의가 총회에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교리문답은 신앙고백에 기초하여 거기에 기술되지 않는 것은 교리문답에 포함시키지 않기로 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은 신앙고백에서 나온 산물이다.

이즈음에 스코틀랜드 위원들도 두 개의 교리문답을 쓰자고 제안했다. 그것은 한 접시에 우유와 고기를 함께 담기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즉 성숙한 성인들을 위해 종합적인 교리문답을 만들고, 어린이들과 초신자들을 위한 쉽고 짧은 교리문답을 더하자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으로 나누어서 작업하게 되었다. 1647년 4월 15일 대요리문답에 관한 토론을 시작했고 그해 8월 5일부터 소요리문답에 관한 토론을 시작했다.

소요리문답위원회는 허버트 팔머가 의장을 맡고, 찰스 헐, 토머스 템플, 존 라이스풋, 존 그린, 필립 델며, 에드문드 카라미, 스탠리 고워가 활약했다. 팔머는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12년 동안 섬겨온 애쉬엘 교회의 목사직을 사임하면서까지 가장 활발하게 참여하다가 교리문답이 완성되기 전에 1647년, 안타깝게도 46세에 별세했다. 그의 사후에 다른 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앤써니 터크니, 스티븐 마셜, 존 워드, 스코틀랜드 대표인 사무엘 러더포드가 크게 활약했다.

소요리문답은 기존에 출간된 여러 교리문답들을 참고하면서, 옥스퍼드 대학의 존 위리스 박사의 작품 「간결하고 쉬운 소요리문답」을 중요한 기본으로 삼고 작성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느 한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위원회 전체 위원들의 토론을 거쳐 완전에 가까운 열매를 생산했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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