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야만, 인간은 ‘유한함’을 이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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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야만, 인간은 ‘유한함’을 이길 수 있다
  • 유선명 교수
  • 승인 2021.02.23 14: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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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명 교수의 전도서이야기 (7) -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이만큼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문구는 많지 않습니다. 영원. 사랑. 마음. 단어들만 하나씩 따로 들어도 왠지 뭉클한데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니… 인간은 영원을 사랑합니다. 일장춘몽 꿈같은 인생이 죽은 뒤는 말해 무엇하랴고 짐짓 외면해 봐도 사람은 본능적으로 영원을 꿈꾸고 원합니다. 무신론자도 유물론자도 자식 걱정을 하고 어떻게든 좋은 것을 물려주려 합니다. 삶의 성취와 기부, 선행을 통해 자신이 헛살지 않았다고, 이 세상에 무언가 좋은 것을 남겨놓고 가기를 원합니다. 죽으면 그만 아닙니까? 내 죽은 후 내 자식이, 내 모교가, 내 나라가 아니 이 지구가 어떻게 된들 죽어 없어진 나와 무슨 상관일까요? 생각해보면 답이 궁색합니다만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존재를 영속적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유전자의 비밀이고 자식과 손주를 향한 본능적 사랑의 본질이며, 명예심과 봉사정신에 사람됨의 온기를 부여하는 비밀의 레시피이기도 합니다.

슬프게도 사람은 영원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영원을 바라는 이 갈망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대답은 명확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며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인간은 죄와 죽음의 저주 아래 있지만, 죄를 넘고 죽음을 넘어 영원에 이르는 길을 바라보며 사는 존재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유한자. 영원으로 가는 길을 모르는 이에게 이것은 인간의 슬픈 운명이자 저주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아는 이에게는 영원의 갈망은 고향을 찾으면 사라질 병입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9, 14-15)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영원을 사모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럼에도 이 땅에서 죄와 죽음의 세력 아래 고통을 당하는 존재. 사망을 이기신 단 한 분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야만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우리들입니다. 전도서는 우리의 유한함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합니다.

세상은 흠투성이고 사람은 모순덩어리입니다. 모든 것이 덧없고 우리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합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느끼는 비통함을 칼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늘이 우리의 본향이라면, 이 땅은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유배지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누리는 것이 행복의 가장 높은 정상이라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없는 상태는 비참의 상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전도자는 말합니다. 모든 것이 헤벨이라고. ‘해 아래’ 모든 것이 말입니다. 그러니 남은 것은 해 아래 이 땅이 아닌 저 위, 저 너머를 보고 사는 소망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헤벨”이라는 헤벨 변주곡은 헤벨을 넘어서신 그분을 알리는 전주곡이 됩니다. 허무의 탄식이 복음의 알림이 되는 비밀이 여기 있습니다. 헤벨을 안 자, 영원을 사랑하는 자여, 그분을 바라보라!

백석대 교수·구약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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