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 복고로 청교도 핍박… 장로교 체제 쇠락의 결과 초래
상태바
왕정 복고로 청교도 핍박… 장로교 체제 쇠락의 결과 초래
  • 장종현 목사
  • 승인 2021.02.23 14: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종현 목사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강해(7) 웨스트민스터 총회 스케치
장종현 총회장
장종현 총회장

크롬웰은 자신을 제거하려고 프랑스와도 음모를 꾸미던 찰스 1세를 체포했다. 의회를 동원하여 열흘 만에 서둘러 재판을 끝내고 찰스를 국가반역죄로 1649년 1월 30일 참수했다. 먼저는 공화제로, 나중에는 크롬웰이 절대적 통치자가 되어 호국경(보호자)으로 불리면서 10년을 통치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찰스의 처형 직후인 1649년 2월 22일 폐회했다. 그러나 비공식적 모임은 계속하다가 총회를 소집한 장기의회가 크롬웰에 의해 해산된 1653년 4월 20일에 끝을 맺었다. 이 비공식적 모임은 매주 목요일 아침에 회의를 열고 교회에서의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의 시험적 사용을 논의하였다.

1658년 크롬웰이 죽고 난 후 정부의 결속력이 떨어지고, 왕정 통치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났다. 왕가의 혈통주의를 주장해 온 왕당파는 프랑스에 피신을 가 있던 찰스의 아들 찰스 2세를 새로운 군주로 옹립했다. 1660년, 왕의 귀환으로 이루어진 왕정 복고는 종교적으로는 영국교회를 다시 국가적인 성공회 체제로 회귀하였다. 청교도 유일한 희망인 의회마저 왕당파가 장악하므로 감독제는 큰 싸움 없이 복귀되었다.

청교도들은 공동기도서의 재도입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뜻마저도 이룰 수 없었다. 새 기도서는 1662년 통일령의 일부로 도입되어 사용이 강요되었고, 국교회의 기도서와 규율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교직을 떠나야만 했다. 많은 성직자들이 성직록(성직자 재정 수입) 유지를 위해 감독의 안수를 받았다. 하지만 2천여 명에 가까운 청교도 목사들이 쫓겨나 해외로 망명하거나 영국에서 다른 직업을 찾았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은 왕정 복고 전까지 16년간 사용되었다. 왕정 복고는 공동기도서를 없애고 성경에 바탕을 둔 예배모범을 영국교회들에 정착시키기 원했던 청교도들의 바람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사건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대표들의 4분의 3이 장로교회 제도를 지지하는 다수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의 장로교 정치 체제의 실현을 관철시킬 수 없었던 것은 자유에 비중을 크게 두었던 사람들이 장로교와 거리를 두고 독립교회파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17세기를 통해 점증된 영국인들의 권위에 대한 저항은 실제로 영국교회의 입지를 상당히 위축시켰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형성된 영국사회의 자유 추구 경향은 오히려 청교도 혁명의 사상적 기반이었던 칼빈주의와 혁명의 주력이 견지했던 장로교 체제 모두를 쇠락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스코틀랜드로 보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큰 환영을 받아서, 1647년 8월 27일 에딘버러에서 모인 총회가 그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이 고백서를 받아들였고, 스코틀랜드 의회는 1649년 2월 7일에 이를 승인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