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넘나들던 항구 도시엔, 복음 담긴 ‘기독교 문화’ 자리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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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넘나들던 항구 도시엔, 복음 담긴 ‘기독교 문화’ 자리 잡아
  • 김맹진 교수
  • 승인 2020.12.08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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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기고 - 호남기독교 선교유적지를 가다 ② 목포와 광주의 근대 기독교 흔적들
(왼쪽)목포양동교회는 1910년 유달산에서 채석한 돌로 지은 석조 건물로 1898년 유진 벨 선교사가 천막을 치고 신도들과 예배를 드린 목포교회가 그 시초다. (오른쪽 위)우일선 선교사 사택은 광주기독병원 2대 원장을 지낸 윌슨 선교사가 살던 사택이다. 광주의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이다. (오른쪽 아래)선교사묘역은 목포와 광주, 순천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숨진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안장된 묘역이다.

<목포>
항구는 바닷물이 드나들 듯 사람이 드나들고 문화가 드나든다. 목포는 1897년 자유무역항으로 개항된 이후 신문화를 받아들이는 관문이 되었다. 기독교가 목포에 전래된 시기가 이 무렵이다. 1892년 미국 남장로교는 한국에 레이놀즈(William Reynolds) 등 7명의 선교사를 파견했다. 이듬해 남장로교 선교부는 먼저 와있던 북장로교와 협의하여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를 선교지역으로 맡기로 결정했다. 

전주(1893년)와 군산(1894년)에 선교 스테이션을 설치한 남장로교 선교부는 목포가 개항되자 세 번째 스테이션을 목포에 설치했다. 목포 선교의 임무를 맡은 유진 벨(Eugene Bell) 선교사는 목포의 변두리 만복동(양동) 공동묘지 부근 야산을 매입하여 선교 부지를 확보했다. 그는 1898년 임시거주지를 마련하여 서울에 머물고 있던 가족을 데리고 목포로 이주했다.

유진 벨은 목포교회(현 목포양동교회)를 열어 전도를 시작했다. 1899년에는 오웬(Clement Owen) 선교사와 함께 ‘프렌치병원’을 세웠다. 그는 목포에서 딸 샬롯(Charlotte Bell)을 얻었으나, 아내 로티(Lottie Witherspoon)를 잃는 슬픔을 겪는다. 1903년 가을에는 스트래퍼(Fredrica Straffer) 선교사와 함께 목포여학교(정명학교)와 목포남학교(영흥학교)를 세웠다. 이로써 전라남도 최초로 목포에 근대식 교회와 병원, 학교가 세워져 복음과 의료, 교육사역을 함께 펼치는 선교 스테이션이 조성되었다. 

목포양동교회는 지은 지 110년이 넘었다. 1910년 유달산에서 캐낸 돌을 사용하여 지은 교회로 2004년 국가등록문화재 114호로 지정되었다. 종탑과 출입문의 변경 외에는 원형대로 보존되어있다. 

목포정명여자중학교 구내에는 선교사들의 사택 2채가 남아있다. 첫 번째 건물은 1910년에 화강석으로 지은 건물로 1960년 무렵까지도 선교사 사택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정명여학교 100주년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목포에서 태어난 유진 벨 선교사의 딸 샬롯(Charlotte Linton:인사레)이 남편 인돈(William Linton) 선교사의 사후 이 집에 와 1964년 귀국할 때까지 살았다. 2003년 국가 등록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었다.

남아있는 두 번째 선교사 사택은 앞의 선교사 사택과 같은 건축양식이나 원형이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정명여중의 종교실과 북카페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독립운동사에 뜻깊은 역사를 남기고 있다. 1983년 이 건물의 천장에서 동경 유학생들이 만들었던 2.8독립선언서 원본과 3.1독립선언서 사본, 만세시위 때 불렀던 ‘독립가’ 사본 등이 발견되었다. 

정명여학교는 1919년 목포 독립운동의 시발점이었다. 정명여학교 학생들은 1919년 3.1운동과 1921년 11월 목포만세운동을 이끌었다. 1937년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목포의 영흥학교, 광주의 수피아여학교, 숭일학교와 함께 남장로교 소속 학교 가운데 가장 먼저 폐쇄된 학교이기도 하다.
유달산 자락에 자리잡은 일본 영사관 아래 일본인 거주지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예배를 드린 교회가 남아있다. 희미하게 ‘목포일본기독교회’라는 글씨 자국이 보인다. 지금은 개인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 불교사원으로 지어졌던 동본원사는 나중에 선교사 줄리아 마틴(Julia Martin)에 의해 개척된 중앙교회가 인수하여 교회로 사용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일본은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목포에 바다를 막아 도시를 조성하고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개설했다. 목포를 통해 쌀과 면화 등의 물자를 수탈하고 중국 침략의 발판으로 삼았다. 같은 시기에 미국 남장로교는 목포에 선교 스테이션을 설치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병들고 불쌍한 사람들을 치료했으며, 신지식과 신문화를 전했다. 개인의 존엄과 평등, 박애정신, 민족자강의식을 일깨웠다. 이들이 남긴 선교유적을 길이 오래 보존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주>
목포를 발판으로 전라남도 내륙으로 진출할 계획을 세운 남장로교 선교부는 광주 변두리 양림리의 공동묘지 일대를 매입하여 네 번째 선교스테이션을 설치했다. 1904년 12월 유진 벨과 오웬 선교사의 가족은 목포에서 배를 타고 영산강을 따라 광주로 올라왔다. 눈 내리는 성탄절 이들은 광주 신자들과 함께 첫 예배를 드렸다. 광주교회는 5년 만에 77개 교회, 5천명이 넘는 교인으로 크게 성장했다. 1896년 광주가 나주 대신 새로운 전라남도의 수부(首府; 도청)로 결정된 후 계속 증가한 인구는 교세확장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광주 선교 스테이션은 1908년 광주남학교(숭일학교)와 광주여학교(수피아학교)를 개설하고, 이후 농업기술과 간호,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를 열었다. 1955년 시작된 광주성경학교는 지금의 호남신학대학교로 발전하고 수피아간호학교는 기독간호대학교로, 수피아여자실업전문학교는 광주보건대학교로 발전했다. 

광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은 1905년 놀란(Joseph Nolan)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제중원(현 광주 기독병원)이었다. 과학적인 치료로 미신과 민간치료법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광주 사람들의 큰 호응을 얻었으나, 1907년 놀란 선교사가 사직하고 임금이 높은 평안북도 운산금광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실망이 컸다. 2대 병원장 윌슨(Robert Wilson) 선교사는 1912년 영국 나병구제협회의 지원을 얻어 나환자 치료를 위한 병원을 지었다. 최흥종 장로의 도움으로 광주 봉선동에 지었던 나병원은 1926년 여수로 옮겨 지금의 애양병원으로 발전했다.         

광주 양림동에는 선교사 사택과 기념관, 학교, 병원, 기념비 등의 선교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선교사역 중에 사망한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안장된 묘역도 조성되어있다. 부친 김창국 목사를 따라 10살 때부터 양림동에서 자란, 커피를 좋아했던 시인 다형 김현승의 흔적도 군데군데 남아있다.

우월선 선교사 사택은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로 제중병원 2대 원장을 지낸 윌슨 선교사의 사택이다. 윌슨 선교사는 의료사역 중에도 이곳에서 고아들을 양육했다. 최흥종 장로가 기부한 봉선리 땅에 병원을 세우고 나병 환자들을 치료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윌슨 선교사의 사택 옆 산책길 계단을 올라가면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잠들어있는 선교사 묘역이 나온다. 돌계단 하나하나에 선교사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오웬, 유진 벨 선교사 등을 포함한 22명의 선교사와 가족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선교사 자녀들의 묘비는 검정색 대리석으로 작게 만들어져 있다. 낯설고 먼 나라에 와 기독교 정신을 전하고, 무지를 깨우치고 질병을 치유하다가 과로와 풍토병에 목숨을 잃고 이곳에 묻혀있는 선교사들의 숭고한 정신과 희생을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오웬 기념각은 1909년 장흥지역 선교 중에 급성폐렴에 걸려 42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한 오웬 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해 1914년에 건립했다. 회색 벽돌로 지은 2층 건물로 최대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개화기 광주 신문화의 산실로 음악회, 오페라, 연극, 무용 등이 공연되었으며 1920년 광주 최초의 음악회인 ‘김필례 음악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개화기 이 땅 곳곳을 누비며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행한 복음전도와 치료, 교육은 당시 이 땅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축복을 주었으며 무지와 가난, 질병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왔다. 선교사들이 남긴 유적은 도시개발과 무관심 속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선교사들이 이 땅에 전하고자 했던 숭고한 정신과 희생이 길이 오래 기억될 수 있도록 선교유적 보존에 힘을 모아야겠다.

김맹진 교수/ 백석예술대학교 관광학부
김맹진 교수/ 백석예술대학교 관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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