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뵈는 것이 없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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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뵈는 것이 없을 때
  • 정석준 목사
  • 승인 2020.10.2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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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중졸, 어머니는 국졸.”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가정통신문에 기록한 부모님의 학력이다. 물론 거짓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쯤은 돼야 친구들에게 밀리지 않을 듯싶어 생각해 낸 우리 형제들의 아이디어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야단치실 때 쓰는 어휘는 누구보다도 우리가 먼저 알아챌 만큼 무지한 육두문자들의 나열이었다. 무척 흥분하시면서 빗자루를 거꾸로 드실 때는 “이놈이 눈에 뵈는 게 없네”라고 하셨다. 당연히 이것도 무척 점잖은 나의 표현이다. 그러나 좀 배웠다 하는 우리들 입에 붙은 말이다.

종교를 한자풀이로 하면 “으뜸가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한 사회와 정치 그리고 인간이 기대어 가르침을 받을 만한 것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종교는 없는 것과 같다. ‘노자’를 풀어 해설집을 완성한 ‘도올’의 주장이다. 그에게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로의 자칭함이 있으니, 대적하기 쉬운 상대는 아니다. 그리고 모두 틀린 말은 아니라는 점이 부끄럽다. 그가 말하는 종교는 주로 기독교를 지칭하는 것이니 더욱 그리하다.

포르투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사라마구(Saramago)’가 쓴 장편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가 있다. 차를 운전하던 한 남자가 신호대기 중 갑자기 눈이 멀어버리는 것으로 시작해서(unexplained mass epidemic of blindness), 접촉된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상황이 전개된다. 정부는 이를 전염병으로 여기고 그들을 정신병동에 격리 수용한다. 그러자 그곳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더라는 이야기다. 내면에 감추어진 인간의 본성이 바닥까지 드러난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 Apocalypse)”가 재현되더라는 말이다.

전염병은 이미 교회의 예배 모습을 바꿔놓았다. 대면 비대면의 갈등뿐만 아니라, 인간의 게으르고 악한 본성에 불을 지펴놓게 됐다. 앞으로 또 다른 상황이 동일하게 전개된다면 미래의 목회진로를 장담해 낼 수 없다. 언제고 기대어 힘을 받을 중심을 잃으면 회복은 불가능하다. 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권력과 힘을 가진 자에게서 정리된다.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수사학적인 말솜씨와 고집스러운 힘에 기인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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