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은 ‘소망의 미래’ 보장… 악인 부러워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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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은 ‘소망의 미래’ 보장… 악인 부러워 말라
  • 유선명 교수
  • 승인 2020.09.01 15: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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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명 교수의 잠언이야기(28) -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여호와를 경외하라”(잠 23:17)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러움의 파괴력을 느껴본 사람은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압니다. 부럽다는 것은 그 대상이 가진 것을 나도 갖고 싶어 한다는 뜻인데 맘만 먹으면 가질 수 있는 거라면 부러워할 일도 없을 터이니 부러움의 대상처럼 되기란 어렵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내버려둔 부러움이 열등감 자괴감으로 가거나 질투로 변하면 심화를 입게 됩니다. 질투와 시기는 결국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상하게 합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항목이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인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십계명은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 사람이 따라야 할 가장 근본적 원리들을 담은 만큼, 사람의 본성에 대한 가장 예리한 관찰도 담고 있습니다. 질투는 비교를 전제로 하고, 비교는 다른 점에서는 대등한 상대 간에만 의미를 갖습니다. 십년 선배가 나보다 한참 앞선 것은 당연하지만 동기동창이 나보다 한 발짝 앞서면 신경이 쓰이지 않던가요. 살면서 만날 일 없는 할리우드 스타의 대저택이나 슈퍼카는 호기심은 가지만 우리 마음에 내상을 입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기 이웃, 자기 친구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어제까지 아쉬운 줄 몰랐던 내 차가 옆집에서 새로 뽑은 차 옆에 세워놓으니 갑자기 못난이가 됩니다. 운전을 해보니 왜 이렇게 덜덜거리는지 이런 차를 그동안 어떻게 탔었나 불만이 치밉니다. 5년째 잘 보고 있던 거실 TV 화면이 오늘은 왠지 흐려 보입니다. 지난 구역예배 모임 박 집사 집에서 본 65인치 올레드 TV 때문일리는 없지만 말입니다!

그나마 자신이 부러워하는 상대방을 존경해서 그 사람을 닮고 싶어진다면 부러움이 자기발전을 위한 긍정적 에너지가 되기도 합니다. 아무개처럼 되고 싶어 노력한 끝에 오늘 이 자리에 왔다는 종류의 성공담이 많은 이유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이유가 그 사람이 누리는 성공과 부, 권력 같은 것이라면 그런 부러움은 영혼을 상하게 합니다. 부러움과 질투가 미숙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깊은 영성을 지닌 수도자들도 서로를 비교하며 이는 질투심과 싸워야 했습니다. 주님의 수제자로 알려진 베드로가 주님의 사랑을 입은 제자 요한의 앞날을 궁금해 하다 “그 일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너는 나를 따르라”는 답을 주님께 들은 것을 보면 베드로의 궁금함이 호기심만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요 21:21~23). 깊은 신앙심과 지혜를 담은 시편 73편의 저자 아삽은 세상에서 형통하는 악인의 모습을 보고 자기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그로 인해 자신이 믿음을 잃을 뻔 했던 경험을 절절히 고백합니다(시 73:1~3, 16).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이 훈계는 단순하고도 깊습니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잠 23:17~18). 17절에서 18절을 잇는 ‘정녕히’는 인과의 연결사가 아닙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신앙을 지키면 그 결과로 좋은 미래가 열리리라는 말씀이기보다는, 우리에게 장래와 소망이 있다는 것이 확실하니 악인의 형통을 보며 휘둘리지 말고 여호와 신앙을 한결같이 지켜내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그 자신이 오래 씨름한 끝에 아들에게 전해주었을 이 경구는 이천 수백 년이 지난 오늘, 소유를 존재보다 앞세우다 못해 소유가 곧 존재라고 착각하며 사는 이 시대에 다시금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백석대 교수·구약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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