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통합 매력은 ‘백석’ 브랜드… 신학교가 건재한 교단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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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통합 매력은 ‘백석’ 브랜드… 신학교가 건재한 교단은 달랐다
  • 이현주 기자
  • 승인 2020.07.29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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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단 통합의 역사를 통해 본 백석의 미래 - 연재를 마무리하며(상)

‘교단 통합’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
분열은 교회 신뢰도 떨어뜨리고 상처만 남겨

본지는 지난 4월부터 지금까지 약 3개월 간 백석총회가 설립 초기부터 지향해온 ‘교단 통합’의 역사를 살펴보고, 우리 총회가 나아갈 방향성을 되짚어 보았다. 

백석총회와 백석학원의 성장에 대해서 설립자 장종현 목사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다. 누구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은총 속에서 이루어진 결실이다. 각 교단마다 신학교를 지원하느라 교단은 물론 큰 교회들이 엄청난 정성을 쏟아 붓는데 반해, 백석총회는 오히려 학교의 성장을 밑거름 삼아 상생하며 부흥을 거듭해왔다. 그리고 부흥성장의 이면에는 삼위일체 신앙고백과 십자가 부활의 신앙이 같다면 조건 없는 통합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믿음의 실천이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분열하고 갈등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화해하며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저마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교회와 노회, 총회를 가르는 것이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백석총회 역시 지난 41회기에 역사상 유래 없는 갈등과 이탈을 목도했다. 백석총회가 크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다.

갈등의 책임은 끝내 자기의 이기적인 생각과 욕심을 따른 이들에게 있다. 큰 싸움에서 자기 명예는 지켰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회와 노회, 총회에 상처를 입힌 것은 분명한 죄다. 억울하고 고통당하면서도 끝까지 총회를 지켜낸 이들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누구에게 상급을 주실 것인지 깊은 신앙적 성찰이 필요하다.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정리된 교단 통합 역사를 간략하게 기술하고 총회의 현재와 미래를 전망함으로 끝을 맺고자 한다. 

1983년 신학대학원 과정을 개설한 백석신학은 교단 정체성을 지키며 성장해 나갔다.
1983년 신학대학원 과정을 개설한 백석신학은 교단 정체성을 지키며 성장해 나갔다.

1. 간략한 백석총회 통합 역사
백석총회는 신앙과 신학노선이 같은 교단 간 통합을 지속해왔다. 197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복음총회 설립 후 △1979년 합동 비주류 △1981년 연합총회(연합+은혜) △2013년 개혁 장지동 △2014년 개혁 광주, 예장 성경 △2015년 예장 대신, 합동진리 등과 연합을 이뤄냈다. 

연합의 목적은 ‘세’를 불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연합의 목적은 한국교회의 분열을 반성하면서 하나님나라 공동체를 확장해 나가기 위한 노력이었다. 하나의 성경을 믿고, 삼위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영생을 믿는 그 믿음만 같다면 굳이 갈라설 이유도 따로 살 이유도 없었다. 분열은 교회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에너지를 분산시키지만 통합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복음전파와 하나님나라운동에 자양분이 된다. 

2. ‘백석’ 브랜드 가치 높아
백석을 성장시킨 또 하나의 비결은 바로 브랜드 이미지다. 2009년 합동정통에서 ‘백석’으로 명칭을 변경한 이후 통합의 주도권은 백석으로 완전히 넘어왔다. 합동정통에서 백석으로 명칭을 변경할 때, 총대들은 “합동 아류 혹은 이단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어 전도가 힘들다”고 호소했었다.

총회 이름이 생경하다보니 지방에서는 ‘이단’ 의혹도 받았다. 그래서 총회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또 하나 이미 글로벌 대학으로 성장한 ‘백석대학교’가 든든히 지탱하고 있어 총회 명칭 변경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총회와 학교가 ‘백석’ 이름으로 하나가 된 것이다. 

합동과 통합한 개혁총회 산하 교회들이 ‘예장 합동’이라는 명칭을 통해 부흥의 기회를 얻었듯이 합동정통 산하 교회들도 ‘백석’으로 명칭을 바꾼 후 날개 단 듯 성장했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이 위장교회들을 설립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을 단 교단만 300개가 넘는 현실에서 ‘백석’이라는 뚜렷한 정체성은 목회를 안정시키고, 성도들의 신뢰를 가늠케 한다. 이제 ‘백석’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뢰의 척도이자 건강성의 상징이 되었다. 

3. 신학교는 모든 총회의 뿌리
교단 통합의 역사에서 가장 오랜 시간 대화하고, 가장 많은 것을 양보하고도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통합이 바로 예장 대신과의 만남이다. 

1976년 설립된 백석대학교 전신인 대한복음신학교에는 대한신학교 출신 교수들이 신학을 지도했다. 설립자 장종현 목사도 대한신학교 출신이다. 그래서 1980년대부터 양 교단 핵심인사들은 “우리 합치자”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런데 왜 두 교단의 만남은 오랜 시간 공을 들이고도 완전한 결합을 이루지 못한 걸까? 

그 배경은 대신의 태생적 갈등에서 찾을 수 있다. 대신총회는 예장 성경장로회로 출발했다. 교단의 모태로 여기는 대한신학교는 당시 장로교단에 속했던 남대문교회 김치선 목사가 1948년 야간 장로교신학원으로 설립했고, 1952년 대한신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대신은 ‘자생교단’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ICCC(국제기독교협의회)의 지원을 받았고, 마두원 선교사와 손을 잡아 ‘성경장로회 총회’로 설립됐다. 그러나 1968년 대신은 첫 분열을 맞이했고, 마두원 선교사의 ICCC 계열과 김치선 목사의 신학교 계열이 나뉘어지면서 교단 명칭은 ‘성경-성장-대신’으로 세 차례나 변경됐다. 

더욱 심각한 갈등은 ‘신학교’에 있었다. 대신총회는 신학교를 지켜내지 못했다. 대한신학교는 교단이 추구하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노선에서 벗어났고, 1987년 안양대학교로 이름이 바뀌면서 종합대로 승격됐지만 대신의 역사와 신학은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 됐다. 

신학교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학교법인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를 설립했지만 이 역시 4년 갈등 끝에 총회와 결별하고 만다. 대한신학교로 시작됐지만 교단 정체성을 담은 신학교가 없었던 대신총회. 대신총회는 1990년대 중반부터 타 교단과 통합을 모색하며 신학교로 인한 상처 치유에 나선다. 그렇게 백석과 수차례 통합논의를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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