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 논리로부터 나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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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 논리로부터 나오라
  • 김학중 목사
  • 승인 2020.04.16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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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중 목사/꿈의교회

바야흐로 선거철이다. 후보를 홍보하는 차량이 돌아다니고, 귀를 사로잡는 다양한 노래들이 들린다. 또 곳곳마다 현수막이 붙어 있고, 벽보가 붙어 있다. 옛날에는 현수막이나 벽보를 마구 훼손하거나 상대방 후보에게 노골적인 방해 공작을 펼친 일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처벌이 강화되어서 그런지 그런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선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어떨까? 얼마 전 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사전투표를 며칠 앞두지 않은 시점에서 지역구 선거의 지지 후보를 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15%, 비례대표 선거의 지지 정당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31%였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특별히 확실한 지지자나 지지 정당을 갖지 않았을 경우, 설문 조사에 잘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실질적인 부동층은 훨씬 많다는 뜻이다.

선택할 것이 많아서 그럴까? 아니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서 그럴까? 전자라면 참 좋겠지만, 몇 년 전부터 ‘정치 혐오’라는 말이 나온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실상은 후자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최선과 차선’을 놓고 고민해야 할 유권자가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상황! 이것이 우리들의 불행한 현실이다.

무엇이 이런 현실을 만들었을까? 그것은 바로 진영에 따라서 지지할 사람을 결정해왔기 때문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이런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고 자주 보고 있다. 어릴 때, 필자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어른들을 많이 보았다. 

“저 사람은 어느 지역 출신이지만, 사람이 참 좋아!” 또는 “저 사람은 어느 학교 출신이지만, 사람이 참 성실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 사람이 속한 지역과 학교 출신에 따라서, 저 사람의 성격과 행동과 생각이 결정된다는 선입견을 강하게 보여준 말이었다. 지역에 따라서 정치적 성향이 나누어지고 거기에 따라서 어른들은 서로 싸웠다. 

이러한 진영 논리가 사라진 줄 알았는데, 한 세대가 지나도록 모양만 바뀐 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즉, 내가 찬성하는 진영이 어느 쪽인지 먼저 결정한 뒤에, 그 진영에 속한 사람이 누구인지 봐서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최선일까? 그렇지 않다. 우선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에 속한 사람이 두 명 이상 될 때는, 누구를 지지할지 정하지 못한다. 진영에 기댈뿐, 내 주관이 없는 선택이 만드는 촌극이다.

이로 인한 위험성을 우리는 이미 역사에서 보았다. 조선 중기 때부터 시작된 붕당정치는 처음에만 해도 논쟁을 발전시키고 자신들이 공부한 바를 펼칠 기회의 장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승리에 집착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만들면서, 좋은 인재의 길을 가로막고 나라의 근간을 뒤흔드는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진영에 따라 결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 땅에서는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군도 없다는 것을, 역사는 이미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중요하게 볼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인물이다. 진영을 떠나서 저 사람의 인품은 어떤지, 저 사람의 능력은 어떤지, 저 사람이 과연 지도자로서 합당한지, 그 사람을 보고 판단할 때, 최선과 차선을 고를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선거에서만 그럴까? 아니다. 선거 이후에도 정당이나 계파가 아닌 인물 하나하나를 살펴야, 누가 우리를 위한 일꾼인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보니, 두툼한 선거 공보가 와 있다. 어떤 사람들이 선택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결국 누가 국민의 선택을 받을까? 누구를 선택하든지, 그래도 인물이 최고의 답이다. 그리고 같은 진영이라고 무턱대고 믿지 말고, 그 인물이 바른 선택을 하는지 꾸준히 지켜보는 것이 답이다. 누구를 선택하든지, 더 나은 선택이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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