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알고 싶어서 선택했던 게 필사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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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알고 싶어서 선택했던 게 필사였어요”
  • 부산=공종은 기자
  • 승인 2020.01.2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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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로 신구약 성경 필사하는 건축가 박형만

KTX로 아침부터 달려간 부산의 한 작업실. 검은색 하나 없는, 헝클어진 백발의 외모였지만 눈빛은 살아있었고, 손은 따뜻했다. 작업실을 꽉 채운 작품들에는 자세히 들여다봐야 읽을 수 있는 깨알 같은 손글씨가 살아있었다.
 
박형만 작가. 독특한 이력이었다. 건축가이면서 십자가를 만드는 예술가이고, 거기다 성경을 필사한다고 했다. 관심을 끌었던 건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어 필사. ‘원어를 보고 그리는 수준이겠지’ 했던 생각이 무색하게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 서체는 정갈했다. “원어를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필사를 위해 2년 동안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했다. 인쇄체와 필기체 중간 정도 되는 나만의 서체를 개발해서 기록했다”는 대답이었다.
 
박형만 작가에게 성경은, 평생의 삶이 되게 하는 책이다. 이것이 원어로 성경을 필사하는 이유 중 하나다.
박형만 작가에게 성경은, 평생의 삶이 되게 하는 책이다. 이것이 원어로 성경을 필사하는 이유 중 하나다.

# 43년 불교 신자였던 늦깎이 신앙인

“성경을 알고 싶었어요. 그리고 깊이 공부하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 필사였죠. 그런데 내가 예술가잖아요, ‘이왕에 하는 거, 예술적으로 해보자’고 생각했죠. 그래서 노트가 아닌 나무토막에 필사를 하기 시작했어요.”

43살 때까지 불교 신자였던 늦깎이 신앙인은 이 시간의 간격을 좁히고 싶었고, 그래서 매달렸다. 개종했다고 해서 성경을 다 알고, 바로 믿어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고, 구원의 확신이 있기까지는 2년 반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제게 성경은, 평생의 삶이 되게 해야 하는 책이에요. 그래서 기획한 것이 ‘크리스천 예술가로서 성경 필사를 작품으로 남기되, 신구약을 한글로 한 번, 원어로 한 번, 이렇게 두 번 필사하는 것’이었어요.”

그때가 48살. 성경을 공부하면서 로마서를 기록했고, 이것이 첫 출발이었다. 성경 필사에 사용한 나무판은 가로 30센티미터에 세로 1,400센티미터의 크기. 신구약 성경을 한글로 필사하는 데 44개의 나무판이 사용됐고, 전체 13미터 분량이다.

“신구약을 마치는데 5년 정도 걸렸습니다. 그때가 2015년이었어요. 그리고는 신약을 헬라어로 쓰기 시작했죠. 지금 내 나이가 70이니까, 75살 이전에 구약성경도 원어로 끝낼 계획이에요. 그렇게 되면 신구약을 한글과 원어로 두 번 필사하는 것이 됩니다.”

원어로, 그것도 종이가 아닌 나무에 필사하는 게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힘도 몇 배로 들고, 한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네다섯 시간을 꼼짝하지 않고 매달려도 쓸 수 있는 분량은 고작 7~8센티미터. 독하게 4년을 매달린 끝에 헬라어로 기록한 신약 부분을 완성했고, 지난해 12월부터는 히브리어로 구약성경을 필사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나무에 기록하는 필사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헬라어로 신약을 필사하는 데만 4년이 걸렸다.
헬라어로 신약을 필사하는 데만 4년이 걸렸고, 원어로 기록하려고 2년 동안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했다.

# 성경 필사 20년은 축복의 시간

‘디지털시대에 왜 필사를 고집하느냐’는 질문에, “나 같은 아날로그 할아버지가 한 사람 정도는 존재할 필요가 있다”고 쉽게 대답했지만, 녹록찮은 필사의 고통과 신앙의 깊이가 묻어났다.
처음에는 성경을 권별로 작품을 만들었던 것이 이젠 한글,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영어와 일본어 필사까지 6개 국어로 늘었고, 로마서는 6개 국어로 모두 기록하기도 했다. 단순히 필사로만 이어 갔다면 계속 하지 못했을 것. 박 작가에게 성경 필사는 공부였고, 더없이 좋은 생활이었다.

“성경 필사 20년은 굉장한 축복이었습니다. 성경 한 구절을 필사하면 본문을 서너 번 정도 읽게 되는데, 한 글자 한 글자를 기록하면서 말씀 속에 빠져들었고, 그 농도가 정말 짙었습니다. 농밀하게 성경을 보는 맛이 있었죠. 그리고 성경을 필사하면서 인생을 압축적으로 살았는데, 나 혼자만 누렸던 복이었습니다.”

건축가로서의 생활도 익숙한 그이지만, 1년 반 전 부산으로 내려오면서 서울 건축사무소는 모두 정리했다. “내가 건축가이기는 하지만, 건물에 수십 억, 수백 억을 쏟아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성경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사치예요. 사람이 교회이지 빌딩이,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라며 쓴소리를 했다.

지금은 개인적인 부탁이 있으면 건축 설계를 할 뿐, 트리니티교회(담임: 박성일 목사)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원어 성경 필사와 교도소 수감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오롯이 매달린다.
 
# 일상의 물건들로 삶에 녹아든 신앙 표현
십자가는 세 작품을 소개해주었다. 십자가에 둥근 체를 씌운 작품과 청소하는 솔로 만든 거친 십자가, 손거울을 붙인 십자가.


“십자가에 체를 씌운 것은 좋은 것만 가지려는 신자의 위선을 표현한 것이에요. 성경이 말하는 성가신 것, 마음에 찔리는 것들은 다 흘려보내고, 내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갖는 신앙을 표현한 것이죠. 이런 사람은 신앙인이 아니라 그야말로 양아치일 뿐이죠. 청소 솔로 표현한 십자가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의미를 표현한 거예요. 나는 예수님이 세상을 섬기고 청소하러 오셨다고 해석해요. 이것이 오히려 예수님의 의미와 맞죠.”

손거울을 붙인 작품의 아래에는 신약에 나오는 회개에 대한 구절만 기록했다. 거울을 보면서 회개하라는 의미를 담았다. 이처럼 박 작가는 전통적인 것에서 탈피해 현대적 의미를 담아냈고,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물건들을 사용해 삶에 녹아든 신앙을 표현한다.

 

박형만 작가는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물건들을 사용해 삶에 녹아든 신앙을 표현한다.
박형만 작가는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물건들을 사용해 삶에 녹아든 신앙을 표현한다.

#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큰 신앙의 흐름

5년 후면 모든 필사가 완성된다. 지루하고 인내력을 시험하는 시간. 하지만 박 작가는 5년이 빨리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 시간을 충분히, 풍성하게 즐기고 싶어요. 성경의 바다에서 계속 헤매고 싶은 마음이죠. 남들에게는 한 번 쓰는 것도 지루한 시간이겠지만, 나는 이 시간을 즐기고 싶어요. 이 시간 자체가 신앙의 여정이고 삶이기 때문이에요.”

성경 필사가 끝난 이후의 특별한 계획은 없지만, 이런 시간이 녹아 있는 작품들을 모아 조만간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그 또한 자신의 작품을 기다리고, 신앙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계획을 세우지 않아요. 필사가 마무리되는 5년 후에는 다른 일을 하겠지만, 내일, 그리고 필사 이후에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는 나도 몰라요. 기도하면서 그때그때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거죠.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과 큰 신앙의 흐름은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신앙 안에서 아름답게 늙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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