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나갈 길 ‘발자국’으로 남긴 위대한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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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나갈 길 ‘발자국’으로 남긴 위대한 순교자
  • 이인창
  • 승인 2019.12.10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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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기획 - ‘그들이 꿈꾸었던 조국,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 - (36)애국지사 손양원 목사
백범 김구 선생이 손양원 목사를 오산학교 교장으로 청빙하고자 했지만, 손 목사는 나환자를 두고 갈 수 없다며 고사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손양원 목사를 오산학교 교장으로 청빙하고자 했지만, 손 목사는 나환자를 두고 갈 수 없다며 고사했다.

한국교회 위대한 순교자 손양원 목사를 가리켜 흔히들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일컫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리게 된 계기는 용서하기 힘든 용서를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 당시 좌익 청년들이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살해했다. 손 목사는 비통한 가운데서도 아들들을 죽인 청년을 양자로 삼기로 선언했다. 장례식에서는 오히려 하나님께 9가지 감사를 올렸고, 그 중 한 가지는 원수를 회개시켜 양자로 삼도록 하신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엄청난 사랑을 실천했던 손양원 목사, 그의 생애에서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독립운동을 살펴본다. 애국지사 손양원의 삶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자 한다.
 
부친 손종일 장로 3.1만세운동 가담 체포
역사신학자 이상규 석좌교수(백석대)는 손양원 목사의 생애는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고 했다.

 
첫째는 1940년 이전 배움의 길과 나환자와 함께 지낸 목회기이고, 둘째는 우상숭배에 저항하며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었던 1940~1945년 시기이며, 셋째는 해방 이후 목회부터 1950년 9월 29일 후퇴하던 공산권에 의해 49세를 일기로 순교당하기 까지라는 것이다.
 
손 목사는 부친 손종일 장로가 칠원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어린 나이에 신앙을 접할 수 있었다. 칠원 보통공립학교에서 호주 선교사 맹호은(J.F.L. Maccrae)에게 세례를 받고 1919년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해 공부했다.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어린 학생이었지만 그는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부친 손종일 장로가 3.1 만세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마산형무소에 투옥된 것이다. 가세가 기울면서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지난 2014년 95년만에 중동고등학교는 고 손양원 목사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하지만 당시 그로서는 맛본 좌절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조국을 위해 자신도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손 목사는 마산 창신학교에 편입하고 1921년 일본 동경 스가모중학부 야간부에 입학했다. 2년 만에 귀국한 그는 1923년 결혼하고 호주 선교부가 운영하던 진주 ‘경남성경학원’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했다.
 
신사참배 끝까지 반대하다 5년 동안 수감생활
손양원 목사가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환경이 만들어졌다. 손 목사는 1935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1938년 졸업해 경남노회 순회전도사로 파송받아 14개월 동안 경남지역을 다니며 활동하다 해임됐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애양원교회에 부임한 당시 손양원 전도사는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나환자를 돌보았지만, 1940년 9월 25일 일제에 의해 체포됐다.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사랑의원자탄’ 손양원 목사, 나라사랑 몸소 실천한 애국지사
일제 탄압에도 신사참배 반대 설교…투옥 중에도 복음전파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1935년부터였다. 이상규 석좌교수는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초기 강하게 반대하고 저항했지만 탄압이 심화되자 점차 신사참배를 수용했고, 1938년 장로교파가 신사참배를 공식 가결했다”며 “이런 상황에서도 손양원은 개인적인 신사참배 반대뿐 아니라 부흥집회를 통해서도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라고 설교했기 때문에 그의 체포는 예견된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손양원은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과 공의로운 심판을 확신했기 때문에 천황의 현인신 됨을 거부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싸웠던 것”이라고 전했다.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교수는 “손양원 목사는 일제 국가주의를 우상으로 여기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의식과 주체성이 철저했던 분”이라며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단순히 종교적 차원을 넘어 민족주의 측면에서 바르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손양원은 여수경찰서에 구금된 후 광주형무소와 청주형무소에서 5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런 와중에도 최대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 있었다. 심지어 간수에게까지 쪽지를 건네며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이 평가한 손양원 목사
손양원 목사가 출생한 경남 함안군 칠원읍에는 ‘손양원기념관’이 마련돼 있다. 경남지역 최초 만세운동이라고 하는 연개장터 의거에 참여했던 손양원이 아버지 손종일 장로와 만세시위 주도자들과 거사를 함께했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전시물은 백범 김구 선생과 손양원 목사가 같은 책상에 앉아 있는 모형 조형물이다. 백범은 1949년 서울신문에 쓴 칼럼에서 주기철 목사와 손양원 목사를 한국교회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앙인물이라고 칭송했다.
 
실제 백범 선생은 1949년 암살당하기 수개월 전 손양원 목사를 오산학교 교장으로 모시고자 했다. 나환자를 두고 갈 수 없다며 손양원 목사는 제안을 고사했고, 당시 백범은 손 목사에게 조선후기 이양연의 시를 직접 써서 전달했다. 당시 모습은 사진으로도 남아있다. 시 속에 담긴 것처럼 손양원 목사의 신앙과 삶, 애국정신은 지금 우리에게 발자국으로 남아 이정표가 되고 있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廷(수작후인정)
 
“눈 내리는 벌판 한 가운데를 걸을 때라도 어지럽게 걷지 말라 오늘 걸어간 이 발자국들이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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