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본질은 그대로…외형의 유연성을 꾀한 ‘두 개의 문’
상태바
복음의 본질은 그대로…외형의 유연성을 꾀한 ‘두 개의 문’
  • 군위=손동준 기자 
  • 승인 2019.11.12 13: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등록문화재 제291호 군위성결교회를 가다

 왜 조선의 교회는 그렇게 지었을까…궁금증 따라 떠난 군위 여행 
‘골목길 역사산책’ 저자 최석호 교수와 동행하며 건축의 의미 진단
 서울에서 3시간 30분…삼국유사·김수환 추기경 더불어 교회 유명

등록문화재 제291호 군위성결교회 예배당. 두 개의 문이 ‘포치’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왼쪽으로는 남자가, 오른쪽으로는 여자가 드나들었다.
등록문화재 제291호 군위성결교회 예배당. 두 개의 문이 ‘포치’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왼쪽으로는 남자가, 오른쪽으로는 여자가 드나들었다.

서울에서 버스로 3시간 30분. 대구와 경상북도 의성 사이에 자리한 군위는 인구 2만 3천여 명의 작은 도시다. 오이와 자두, 대추가 유명한 이 농촌 도시에 또 한 가지 유명한 것이 있으니 바로 교회다. 

예장 합동과 고신이 강세를 보이는 영남지역에서 드물게 성결교회가 지역 깊숙이 뿌리를 내린 것도 이색적이지만 그보다 특별한 건 교회의 첫 번째 예배당에 있는 ‘두 개의 문’이다. 교회와 함께 ‘생생 문화재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골목길 역사산책’의 저자 최석호 교수(서울신학대학교)를 따라 가을이 한창 무르익은 군위에 다녀왔다.
 

거룩한 도시 군위

최석호 교수는 군위를 ‘거룩한 도시’라고 소개했다. 교회 때문만은 아니다. 일찍이 이 지역은 종교와 관련한 유명한 인물들이 흔적을 남긴 곳이다. 기록은 없지만 고인돌로 추정해보건대 청동기시대부터 마을을 형성한 듯하다. 따라서 군위는 애초에 여러 다른 마을들을 한 행정구역으로 합쳐 부른 이름이다. 그래서인지 백제인과 신라인, 가야인 등이 무시로 군위를 넘나들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여러 계층 사람들이 이주해 들어와서 오늘날의 군위를 형성한다. 군위는 여러 나라 사람이 빈번하게 왕래하던 곳이다. 군위사람은 여러 계층 사람들이 중첩되면서 그 정체성을 형성했다. 순후하고 질박한 품성을 지닌 사람들이 호미와 쟁기를 들고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비단 옷조차 입지 않은 열녀가 살던 고을이 바로 이곳 군위였다. 

이런 순박한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한국 3대 종교의 영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시간 순으로 보면 첫 번째는 군위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한 일연이 있고, 군위읍 용대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김수환 추기경이 있다. 최석호 교수는 마지막 세 번째 인물로 일제가 폐쇄했던 성결교회를 재건한 천세광 목사를 꼽으면서 “한국 사람들의 영성이 태동한 현장이 바로 군위”라고 말했다. 

이날 군위성결교회를 방문하기 앞서 김수환 추기경 생가와 그 자리에 설립된 기념관을 찾았다. 지난해 7월 개장한 김수환 추기경 생가와 일대에 조성된 ‘사랑과 나눔공원’은 지금껏 6만여 명이 다녀갈 만큼 이름난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천주교인들은 물론이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나들이 장소로 사랑받고 있다. 주말에는 평균 1,000여명의 방문객이 찾는다고 하는데 그 비결이 궁금했다. 

최 교수는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의미’를 살려 아름답게 조성된 공원 곳곳을 설명하면서 “개신교에서도 각종 기념 전시관이나 공원을 조성할 때 이 곳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두 개의 출입문

군위성결교회에는 세 개의 건물이 있다. 개척 당시 예배를 드렸던 한옥 예배당을 제외하면 교회가 역대 건축했던 예배당 3곳이 한 자리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명물인 ‘두개의 문’이 있는 곳은 첫 번째 건축 예배당이다. 이 예배당은 건축 이전부터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935년 3월 군위성결교회 제7대 교역자로 부임한 이종익 목사는 부흥회를 열고 1,000원이 넘는 건축헌금을 작정한다. 이후 전국의 성결교회와 일본의 성결교회를 순방하면서 건축헌금을 모금한다. 본격적인 건축을 위해 한옥 예배당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이종익 목사와 교회 장로가 낙상사고로 숨지는 일이 벌어진다. 

큰 슬픔에 빠진 교인들은 삼천포성결교회 예배당을 설계하고 완공했던 임도오 목사를 초청해 건축을 이어간다. 7월에 시작한 건축은 8월에 끝난다. 임 목사는 예배당 현관을 두 개의 툭 튀어나온 포치(porch, 주택이나 건물의 출입구 앞에 위치해 지붕 따위로 그 공간이 덮여 있는 부분)로 만든다. 용마루에 십자가를 세우고 직사각형 창문을 설치했으며, 첨두형 아치창으로 마감했다.

임 목사는 왜 이렇게 설계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남녀가 유별했기 때문이다. 최석호 교수는 “현관이 두 개 있는 건물은 드물다”며 “우리나라에서는 솟을대문을 현관으로 세운 경우가 있지만 이 경우 현관은 두 개가 아니라 세 개”라고 설명했다. 주로 서원이나 사묘에 솟을대문을 세운다. 여성은 이런 곳에 출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굳이 성별차이를 두지 않았다. 다만 ‘동입서출’이라는 유교적 원칙을 지켰다. 오른쪽으로 들어가고 왼쪽으로 나간다. 중앙문은 왕이나 성현만 출입할 수 있었다.

임도오 목사가 예배당 현관을 두 개로 설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엄격한 유교윤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남자는 음의 이치를 따라야 하므로 왼쪽을, 양의 이치를 따라야 하는 여자는 오른쪽으로 출입해야 했다. 최 교수는 “조선사회의 윤리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복음은 일점일획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지킨 대표적인 모습”이라며 “조선교회가 만든 두 개의 문은 한국교회에 경종을 울린다”고 말했다. 

교회가 처음 들어서던 당시 핍박이 상당했다. 먼저 들어왔던 합동 교단의 교회는 저항에 밀려 읍내로 들어오지도 못했을 정도였다. 반면 군위성결교회는 ‘두 개의 문’에 나타나듯 본질은 지키되 외형에 유연성을 기하면서 지역에 뿌리 깊게 정착할 수 있었다.

이 교회는 내년이면 설립 100주년을 맞는다. 이 교회에서 26년째 시무하고 있는 허병국 목사는 “문화재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교인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며 “인구 2만 5천명의 군 단위 교회에서 계속 새로운 영혼이 들어오고 다음세대 교육은 물론이고 외국인 한글학교까지 감당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허 목사는 또 “늙은 교회가 아니라 여전히 생명력 있는 교회로서 복음으로 시작한 백년을 다시 복음으로 달려가기 위해 교회가 가진 자산을 잘 보존하고 알리기 원한다”고 전했다.

최석호 교수가 ‘두 개의 문’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최석호 교수가 ‘두 개의 문’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또 다른 두 개의 문들

예배당에 두 개의 문을 설치한 곳은 군위성결교회만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의 정동제일감리교회 벧엘예배당이다. 1887년 아펜젤러 선교사는 스크랜튼 부인의 명의로 된 달성 사택 뒷문에서 돌을 던지면 닿을 거리에 있는 작은 초가집을 사고 ‘벧엘예배당’이라 이름 짓는다. 11월에 근처에 있는 더 큰 집을 사서 예배당을 옮기고 큰 방 중간을 기준으로 병풍을 쳐서 남녀를 좌우로 나누고 예배를 드렸다. 그해 성탄절 첫 조선어 설교를 시작하면서 한양의 첫 개신교 교회 정동제일감리교회가 시작된다. 

이후 고종의 포교 금지령으로 예배당이 처분되고, 1897년 12월 26일 아펜젤러는 지금의 벧엘예배당을 헌당한다. 예배당은 배제학당과 이화학당 사이 언덕에 위치했는데 왼쪽 언덕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왼쪽 문으로 드나들고, 오른쪽 언덕에서 이화학당 학생들이 오른쪽 문으로 드나들었다. 예배당 중앙에는 장막을 쳐서 남녀가 서로 볼 수 없게 했다. 주일이면 청춘 남녀가 중앙에 있는 교회를 향해 몰려들어 ‘연애당’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얼굴도 한 번 본 적이 없으니 아이러니다. 

이 건물은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일부 무너지고 1980년대 화재로 일부 소실되기도 했지만 크고 작은 증축에도 원래 건축물에 심한 훼손 없이 오늘날에 이르렀다. 

광주에도 두 개의 문이 있다. 양림동 양림오거리에서 양림장로교회 십자가가 높이 보이는 길을 따라 걸으면 네모 반듯한 건물이 나온다. ‘오웬기념각’이다. 유난히 문이 많은데 정방형건물 모서리를 중심으로 좌우를 나눠 남녀 출입문을 달리했다. 벧엘예배당과 마찬가지로 남자인 숭일학교 학생들은 왼쪽으로, 여자인 수피아학교 학생들은 오른쪽 출입문을 썼다. 

최석호 교수는 “오웬기념각과 벧엘예배당, 군위성결교회 등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3대 교단 모두 남녀 출입문을 달리했다”며 “강한 유교 윤리에 사로잡혀 남녀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살았던 조선 사람들을 배려한 건축”이라고 설명했다. 

최석호 교수가 옥성삼 교수와 함께 쓴 신간 '왜 조선의 교회는 두 개의 문을 만들었는가'
최석호 교수가 옥성삼 교수와 함께 쓴 신간 '왜 조선의 교회는 두 개의 문을 만들었는가'

한편 군위성결교회는 문화재청이 실시하고 있는 ‘생생문화재 사업’에 선정된 290개 문화유산 관광지 가운데 하나다. 최 교수는 “이 많은 지역 문화재 활용 사업 중에서 기독교 문화재 사업은 단 하나뿐”이라며 “한편으로 아쉽고 다른 한편으로 너무나 소중한 기독교 문화재를 한국교회가 더 많이 아끼고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군위성결교회와 ‘두 개의 문’을 가진 교회들의 자세한 이야기는 최 교수가 최근 펴낸 책 ‘예배당으로 본 한국교회 100년사 왜 조선의 교회는 두 개의 문을 만들었는가’(시루, 최석호·옥성삼 공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