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삶보단 죽음을…혹독한 고난에도 신앙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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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삶보단 죽음을…혹독한 고난에도 신앙 지켜
  • 한현구 기자
  • 승인 2019.10.16 1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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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 '일사각오' 주기철 목사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기의 조국 유다가 망하는 것을 보면서 눈물 흘리며 회개하라고 목청이 터져라 외쳐댔건만, 오늘의 목사님들은 왜 현세의 권력에 아부만 하고 일본의 태평성대를 찬양하며 눈물은커녕 오히려 이 사악한 시대와 어두운 현실에 아첨만 하고 있는가?”

1938, 일제의 총칼 앞에 조선예수교장로회가 무릎을 꿇었다. 누가 보아도 다른 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우상숭배이자 민족 반역행위임이 자명한 신사참배를 애국적 국가의식이라 호도하며

앞장서 실천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이 신사참배 결의는 지금까지도 한국교회의 가장 부끄러운 역사로 손꼽힌다.

하지만 엘리야를 위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7천 명을 남겨놓으셨다고 했던가. 한국교회에도 세상 권력의 총칼에 굴복하지 않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다. 특히 주기철 목사(1897~1944)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정신으로 일제의 갖은 고문에도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었고 끝내는 목숨까지 바쳤다.

주기철 목사가 마지막에 시무했던 평양 산정현교회의 모습.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에 끝까지 반대했다는 이유로 목사직에서 파면당하기도 했다.
주기철 목사가 마지막에 시무했던 평양 산정현교회의 모습.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에 끝까지 반대했다는 이유로 목사직에서 파면당하기도 했다.

 

신사참배 결의에도 굽히지 않은 신앙

주기철 목사가 기독교를 처음 접한 것은 1910년 성탄절, 맏형을 따라 호기심에 웅천교회에 가게 되면서부터다. 이후 1913년엔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기독교 교육을 받게 된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19회 졸업생으로 졸업한 그는 부산 초량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돼 첫 목회를 시작한다. 주 목사가 부임할 당시 초량교회의 성도는 200명에 채 못 미쳤는데 그가 목회한 5년 동안 400여 명으로 증가했다. 이후 주 목사는 문창교회를 거쳐 평양 산정현교회로 사역지를 옮기게 된다.

목숨을 건 신사참배 항거도 이때부터다. 당시 평양의 기독교학교들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폐교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37년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황국신민화정책을 시행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19382월에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이란 것을 수립하고 학교를 넘어 교회와 성도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한국교회도 처음부터 신사에 고개를 숙였던 것은 아니다. 장로교단은 신사참배가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는 우상숭배이고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이내 몇몇 교회와 교인들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끝내 19389월에는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만다.

하지만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굳은 의지의 신앙인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주 목사는 금강산에서 열린 전국 목회자 수양회에서 구약성경의 예레미야 선지자를 예로 들며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책망했다. 앞선 설교에 이어 주기철 목사는 한국교회를 향해 이렇게 외친다.

세례요한은 동생의 아내와 간통한 헤롯왕을 그 면전에서 책망하였다.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한 손에 들고 있는 통치자 앞에서 그 죄를 책망한 세례요한은 물론 일사각오였고 그 일사각오 연후에 할 말을 다했으며 일사각오 연후에 선지자의 권위가 섰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목사들은 왜 강단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못하는가. 몰라서 말을 못하는가, 알고도 모르는 체 하는 것인가. 왜 벙어리가 되어 떨고만 있는가.”

하지만 주기철 목사의 울부짖는 듯한 외침은 마지막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주 목사를 감시하고 있던 일본경찰이 황급히 강단에 올라와 그를 끌어내리고 만 것이다.

 

 

혹독한 고난에도 끝까지 지킨 신앙

그 후 주기철 목사에게는 기나긴 고난의 세월이 시작됐다. 강경한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일제의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던 주 목사는 1938년 처음 구속을 당한 이후 줄곧 감시와 탄압에 시달리며 옥고를 치른다.

한 번 일제에 붙잡히면 차마 말로 설명하기 힘든 끔찍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잡혀간 이들이 차라리 죽기를 바랄 정도였다. 그 중에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자신의 신념을 저버린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모진 고난에도 주기철 목사의 신앙과 신념은 하나님 나라에 가는 그날까지 꺾이지 않았다.

우리 주님 나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시고 피 흘려 죽으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더 시들기 전에 더 늙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리워지기를 바랄뿐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고문과 매질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선뜻 그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고문을 이겨내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는 것을 단순히 글로만 받아들이기 쉽다. 하지만 그도 고난이 쉬워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주 목사의 아들 주광조 장로의 간증에 따르면 마지막 옥고를 치르기 전 주기철 목사도 떨며 울면서 기도했다고 한다. 그도 혹독한 육체적 고통이 두려웠던 범인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해 있었다.

결국 광복을 14개월 앞둔 19444, 주기철 목사는 옥중에서 눈을 감는다. 48세의 길지 않은 생이었지만 어떤 고난에도 굽히지 않는 신앙과 순교의 정신은 그의 마지막 설교와 함께 한국교회에 잊히지 않고 남아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십시오.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시오. 나는 내 주님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는 살 수 없습니다. 비겁하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한현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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