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걷는 서울 도심 산책길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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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걷는 서울 도심 산책길 어때요?
  • 손동준 기자
  • 승인 2019.10.0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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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역사산책’ 저자 최석호 교수와 함께 걸어본 ‘광복길’
구세군영천교회‧딜쿠샤‧체부동교회 등 이야기가 있는 산책길
걸으며 ‘역사’ 속으로…길속의 교회 흔적 찾는 재미도 ‘쏠쏠’

제법 쌀쌀해진 가을 바람이 콧잔등을 스치는 계절이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만큼 이제는 봄가을이 사라지고 덥다 싶으면 바로 추워지고 춥다 싶으면 바로 더워짐을 느낀다. 그래서 이 가을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모처럼의 청명한 공기를 만끽하며 도심 속 역사의 흔적들을 돌아보면 어떨까. ‘골목길 역사산책시리즈의 저자인서울신대 최석호 교수(관광경영학과)와 함께 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에서 출발하는 광복길을 걸어봤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의 골목. 과외방과 식당을 거쳐 현재는 마을 전체가 전시관이 됐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의 골목. 과외방과 식당을 거쳐 현재는 마을 전체가 전시관이 됐다.

 

경교장과 박물관마을

서대문역 4번출구로 나와 직선으로 100여 미터를 걸으면 4.19민주혁명기념도서관이 나온다. 이곳에서 출발해 체부동교회에 이르는 3시간 분량의 산책길을 최 교수는 광복길이라고 명명했다. 서울시에서도 이 루트를 토대로 산책 코스를 개발하고 있다고 하니 그 전에 미리 걸어보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 될 것 같다.

첫 번째 목적지인 4.19민주혁명기념도서관은 4.19혁명의 숭고한 이념과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도 계승발전시키고자 설립된 전문특수 도서관이다. 1960년대에는 4.19혁명희상자유가족회 사무실로 사용됐고.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였단 이기붕의 소유재산이었던 것을 국가 환수 무상으로 대여하여 도서관으로 개관했다. 1990년대에 고 김영삼 대통령의 4.19묘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현대식 도서관으로 건립이 추진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1층에는 혁명 당시의 사진과 기록이 전시돼 있고 역대 대통령들의 방명록도 볼 수 있다.

이 곳을 빠져나와 진행방향을 따라 잠시 걸으면 왼쪽에 계단이 보인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강북삼성병원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경교장을 만날 수 있다.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공간이자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역사의 현장이다. 서울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이자 백범 김구가 서거한 역사적 현장인 경교장을 원형 복원하고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경교장 2층에 위치한 집무실에 들어가면 유리창에 남아 있는 김구 선생의 암살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안두희가 쏜 총탄이 유리창을 관통했고 이 유리창은 김구 선생 암살 직후 미국의 사진기자가 찍어 라이프지에 게재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경교장 바로 옆으로는 서울시가 조성한 돈의문박물관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곳은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가정집을 개조해 소수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외방이 성행했던 지역이다. 주변에는 서울고와 경기고, 경기중, 경기여고 등 명문학교가 있었고, 광화문과 종로2가 일대에는 유명 입시학원이 많아 사교육의 적지였다. 1970년대 이후 다수의 명문고들이 강남으로 옮겨가고, 과외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신문로 일대 과외방 열풍은 서서히 사그러졌고 이곳은 회사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가가 됐다.

이곳은 2003돈의문 뉴타운으로 선정되면서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고 근린공원으로 조성될 계획이었으나 한양도성 서쪽 성문 안 첫 동네로서 역사적 가치가 조명되면서 마을의 원형을 유지하는 쪽으로 도시계획이 변경됐다. 서울시는 서울형 도시재생의 일환으로 마을 전체를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돈의문 지역의 역사를 소개하는 돈의문 전시관과 전통문화체험이 가능한 한옥시설, 6080세대의 추억이 살아 있는 아날로그 감성공간 등 세대를 초월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가득하다.

 

홍난파 가옥.
홍난파 가옥.

홍난파 가옥과 딜쿠샤

돈의문박물관마을을 빠져 나와 강북삼성병원을 좌측으로 두고 송월길을 따라 걸었다. 대로를 빠져 나온지 불과 몇 분 되지 않았음에도 사방이 고요하다. 시에서 조성한 산책길이 호젓하기 그지없다. 오른쪽으로 서울시교육청과 기상청 서울관측소 등이 자리하고 있는데 건물 아래로 언덕을 따라 옛 성곽의 흔적도 볼 수 있다.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새롭게 조성된 아파트 단지들이 보인다. 최 교수의 말에 따르면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전까지 이곳은 서울에서 손에 꼽을 경치를 자랑하는 지역이었다고 한다. 그때의 모습을 상상 속으로나마 그려보며 계속해서 나아가다 보니 홍난파 가옥에 도착했다.

홍난파 가옥은 지하 1층 지상 1층의 붉은 벽돌조 건물로 독일계통 선교사의 주택으로 지어졌다. 근처 송월동에 독일 영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대에 독일인 주거지가 형성됐는데 주변의 건물들은 다 헐리고 이 집만 남아 있다. 특히 이 집은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가 6년간 지내면서 말년을 보냈는데 이 때문에 홍난파 가옥이라고 불린다. 홍난파는 이 집에서 지내면서 그의 대표작 가운데 많은 곡을 작곡한 것으로 전해진다. 홍난파는 당시 방송국의 필수요소로 꼽히는 관현악단을 만들어 활동했고 이를 통해 대중에게 새미클래식을 보급했다. 그의 몇몇 작품들이 나라 잃은 백성의 비애를 담은 것과 별개로 황군을 위한 군가를 작곡하는 등 친일행적 논란이 있어 홍난파 가옥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홍난파 가옥을 지나 80미터쯤 걸어가면 구세군영천교회가 나온다. 이 교회 우편에는 시멘트로 덧칠한 절벽이 자리하고 있고 그 아래 한자 8자가 적힌 비석이 있다. 율곡 이이 선생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성동인우 애지산학이라는 8글자는 원래 암벽에 새겨져 있었다. “나는 물고기나 새처럼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아 왕의 천거를 거절하는 내용이다. 교회가 이곳에 있던 건물을 매입하면서 암각을 없애고 탁본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역사학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회단체로부터 문화재를 훼손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최석호 교수는 교회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다며 비석과 관련한 일화를 소개했다. 우선 율곡 선생의 친필인지 진위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 최 교수는 율곡 선생의 글자는 비석에 쓰인 것보다 날렵하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곳은 원래 율곡 선생을 기리는 문성사라는 사당이 자리하던 곳이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 지어진 이 사당은 이율곡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이주영이라는 사람이 개인 명의로 집터와 건물을 저당 잡히고 은행돈을 빌려 써 소유권이 은행으로 넘어갔다. 결국 사기꾼에게 속아 건물의 소유권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구세군이 매입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최 교수는 교회를 욕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사례가 사용된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비석에는 위 글은 율곡선생의 이곳 문성사 터에 있었던 선생의 마애각자인 바 풍화작용으로 인하여 원형이 마모되었기에 탁본으로 복원한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문성사는 파주의 율곡선생 친가로 이전했다.

구세군영천교회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는 비석.
구세군영천교회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는 비석.

영천교회를 지나 골목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딜큐샤가 나온다. ‘알버트 테일러 가옥이라고도 부르는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건축된 지상 2층 규모의 서양식 주택이다. 대한제국 및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활동하던 미국의 선교사이자 언론인이었던 알버트 테일러와 그의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가 살던 곳이다.

이 집의 이름인 딜쿠샤는 힌디어로 기쁨’, ‘이상향을 뜻한다. 테일러 부부가 인도 북부 러크나오 지역 곰티 강 인근에 자리한 딜쿠샤 궁전에서 이름을 따왔다. 알버트 테일러는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며 조선의 독립 운동을 도운 인물이다. 3.1운동 전날인 1919228일엔 숨겨졌던 기미독립선언서 복사본을 발견하여 동생 빌에게 전달, 전세계에 알렸다. 미국으로 추방당한 뒤에도 한국에 묻히기를 바랬던 그는 1948년 생을 마치고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됐다.

딜쿠샤는 현재 원형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내년 7월경에는 공사가 마무리 될 예정이어서 현재는 공사 현장 바리케이트 너머의 모습만 볼 수 있다.

 

교회가 떠난 체부동교회 건물

딜쿠샤를 지나 숲을 오른쪽으로 두고 쭉 걷다 보면 길 끝에 단군성전과 국궁전시관이 차례로 나온다. 국궁전시관에서 우측으로 돌아 배화여자대학교를 지나면 홍건익 가옥이 나온다. 홍건익 가옥은 1936년 지어진 한옥으로 서울에서 보기 드문 잘 보존된 원형석조우물과 일각문을 볼 수 있다. 이곳을 지나 이상범 가옥으로 향했다. 청전 이상범 화백이 그린 작품과 그가 작품활동을 하던 작업실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곳에서 배렴과 박노수 등이 배출됐고 청전양식이라 불리는 작품세계도 완성됐다. 근대 한국 미술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관심이 갈만한 곳이다.

통인시장을 들러 허기를 채우고 마지막 목적지인 체부동교회로 향했다. 본래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 교회였던 이 곳은 현재 체부동 생활문화지원센터로 탈바꿈했다. 현재의 건물은 세 번의 증축을 거쳐서 마련됐다. 교회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고 그 터에 지난해 3월 생활문화지원센터가 들어섰다.

최석호 교수가 체부동교회 건축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최석호 교수가 체부동교회 건축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본래 이 건물은 1920년 기도실로 시작해 1931년 교인들의 모금으로 신축됐다. 양반들이 모여 살았던 북촌과 달리 교회가 위치했던 서촌은 중인들이 밀집해 살던 지역이다. 교회 건축에도 그 특징이 그대로 반영됐다. 중인들 특유의 개방성이 있었기에 뾰죽한 십자가 탑이 올라갈 수 있었다. 이 건물은 프랑스와 영국의 근대 건축양식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건축물 중 하나다. 특히 지금은 창문이 된 작은 출입구는 남녀가 유별했던 시절 여성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당시의 시대상이 건축에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 특별함이 더해진다.

서울시는 건축학적 보존 가치가 높은 만큼 옛 교회의 외관을 유지한 상태에서 내부 공간을 개축했다. 교회 공간이 갖는 특유의 집음성을 살려 오케스트라 연습에 특화된 공간이 조성됐다. 건물의 트러스 구조를 그대로 노출시킨 높은 천장이 풍부한 소리를 만든다. 현재 이 곳은 최고 수준의 오케스트라 악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민간 생활예술오케스트라에게 무료로 대관된다. 해마다 4~5회의 콘서트와 문화행사가 열린다.

안타까운 건 이 교회가 매각되기까지 적지 않은 분쟁이 있었다는 점이다. 서촌이 핫플레이스가 되면서 주변 지대가 올라가고 주민들은 집을 팔고 이사를 갔다. 교인들도 줄었고 특히 아이들이 떠났다. 교회에도 매각하라는 유혹이 끊이질 않았다. 교회는 결국 매각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교인들 간의 분쟁도 일어났다. 점차 세속화되어가는 교회의 현실을 마주한 것 같아 조금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오후 2시 무렵 출발한 여정은 저녁 어스름이 되어 끝이 났다. 최 교수는 광복을 전후한 근현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코스라며 그 속에서 교회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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