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으로 전한 ‘사랑’…“아프리카 아이들의 희망 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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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으로 전한 ‘사랑’…“아프리카 아이들의 희망 되고 싶어”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9.09.30 17: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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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cm의 작은 거인’ 김해영 선교사

척추장애와 가정의 고난이 지금의 ‘김해영’ 만들어
아프리카 아이들의 아픔에서 과거 자신의 모습 발견
“삶 전체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전하고파”

“아프리카에 있을 때 제가 유난히도 반짝 반짝 빛나는 것 같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를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는 생각에 제 꿈과 시선은 늘 그 곳을 향해 있습니다.”

척추장애로 인한 굽은 등과 134cm의 작은 키. 어쩌면 세상의 편견 속에 잔뜩 위축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아프리카에서 20년간 국제사회복지사로 활동하며, 작은 거인이 되어 어린 아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선사하고 있다. 고난당하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과거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게 된다는 그는 자신의 불행한 과거가 있기에 이들을 더욱 사랑으로 품을 수 있노라고 고백한다. 그는 20년 동안 국제사회복지사로 아프리카 선교와 NGO활동에 헌신해온 김해영 선교사(54)다.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낙원빌딩에서 만난 김해영 선교사는 “세상에서 달리기 경주를 한다면 저는 꼴등을 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조건일 것이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불행한 사건들이 오히려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이끌었다”고 밝혔다.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낙원빌딩에서 만난 김해영 선교사는 “세상에서 달리기 경주를 한다면 저는 꼴등을 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조건일 것이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불행한 사건들이 오히려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이끌었다”고 밝혔다.

신체의 장애와 잇따라 찾아온 절망의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낙원빌딩에서 만난 김 선교사는 “광야의 시간 누구보다 깊이 하나님을 만났으며,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 끝까지 참고 견딤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과거의 제 모습처럼 말 못할 고난으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2010년에는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 중 하나인 컬럼비아대학원에 진학해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올해 3월에는 백석대학교 신대원 선교학과에 진학해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지금도 꿈을 꾸고 있으며,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한 더 효과적인 선교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장애의 장벽을 뛰어넘어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있었던 비결을 들었다.

계속된 불행은 ‘연단의 과정’

건강하게 태어난 그가 척추장애를 입게 된 것은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신생아 때였다. 집안의 첫째가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로 그의 아버지는 갓난아기에 불과한 그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로 인해 척추장애를 입게 되면서 장애인이라는 낙인 속 어두운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당연히 누려야할 엄마의 따뜻한 사랑도 받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 사고로 머리를 다친 어머니는 정신분열증을 겪으며 10년 이상의 투병생활을 했다. 심지어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때 아버지는 자살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집안의 모든 불행에 대해 ‘너 때문이야’라고 말하며 자신을 원망했다. 그런 어머니를 피해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집을 나가 식모 일을 시작했다. 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어야 하지?’라는 물음표가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인해 정규과정의 중학교도 가지 못하고 미션스쿨인 한남직업전문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당시 선생님의 전도로 교회에 다니게 되면서 그는 인생의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경험하게 됐다.

“장애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따뜻하게 대해줬던 선생님을 통해 매주 교회를 다니면서 제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괜찮다는 마음이 들었고,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쓰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됐습니다.”

이후 김해영 선교사는 1982년부터 4년 동안 7번의 장애인기능대회에 출전해 3개의 금메달을 땄다. 중·고등학교 검정고시에도 합격했고, 산업훈장도 받았다. 10년 가까이 편물기술을 익혀 인정받는 기술자가 되면서 그의 삶은 어느 때보다도 찬란히 빛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기에도 변수는 존재했다. 24살, 한국에서의 평범한 대학생활을 꿈꾸었지만 대학입시의 실패로 다시 한 번 좌절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대학입시에 실패하면서 또 다시 재수를 해야 하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한 마음뿐이었습니다. 다시 기도하는데, ‘내가 가고 싶은 것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고 필요로 하는 곳에 가라’는 마음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때마침 신문에서 아프리카 보츠나와 그루터기선교부 직업학교에서 아프리카 ‘굿포흐’ 직업학교의 교사를 지원받는다는 공고문을 보게 됐으며, 편물교사로 지원하게 됐다. 그의 삶이 180도 뒤바뀐 순간이었다.

‘이곳에서 나와 함께 살자!’

이를 계기로 아프리카로 떠나게 된 그는 그 어떤 시간 보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은혜를 경험했다. 김 선교사는 “현실은 대학입시라는 난관에 부딪혀 아프리카에 가게 된 것이지만, 이것이 오히려 제가 30년간 해외 선교사로 살아가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미국 유학까지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아프리카에서 시간을 보낸 지 14년이 흐른 뒤, 한국에서 파송됐던 이들이 모두 떠나면서 다시 한 번 고비가 찾아왔다. 김해영 선교사 홀로 학교에 남게 되면서 사역을 그만두고 자신 역시 떠나야할지 막막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깊은 고독감과 외로움에 몇 개월간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이곳에서 나와 함께 살자’라는 음성으로 저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쓸모 있고, 잘나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떠난 그 자리에도 나와 함께하길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후 마음을 다잡은 그는 학교에서 4년간 교사로 활동했으며, 폐교위기의 학교를 살리면서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됐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덕분이었다.

‘134cm 김해영’, 아프리카의 거인되다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야 하니 그는 성경을 깊이 있게 공부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성경통독을 하면서 큰 은혜를 경험했다. 어린 시절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자신의 장애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됐다.

“선교사로 생활하면서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오히려 더 좋은 ‘나’라는 그림을 만들기 위한 작은 퍼즐조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영어도 잘하지 못하는 나를 아프리카에 부르신 것은 그 아이들의 삶 속에서 저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투영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과거 어린 ‘김해영’의 상처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참혹한 현실을 더욱 가슴 깊이 껴안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많은 제자들이 원인 모를 질병과 임신, 학대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어린 시절의 자신과 너무 닮아있는 아이들을 보며, 그들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품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게 진심을 담아 아이들을 격려하고 이해와 공감으로 다가가니 아이들 역시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가 교장으로 학교를 계속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도 현지 아이들과 교사들이 그의 진심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 선교사는 “어쩌면 자신들보다 키도 작고 연약해 보이는 사람을 잘 따라와 준 것은 제가 그들의 결핍에 대해 야단치거나 손가락질 하지 않고, 진심으로 존중하고 사랑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라며 “말보다 더 큰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결핍이 누군가의 ‘희망’되길

아프리카 선교사로서 무엇보다 깊이 하나님을 만난 그에게 하나님은 다음 스텝을 밟게 하셨다. 학교의 학생들을 가르치며 다양한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해왔지만, 사회복지를 공부한 경험은 없었던 그다. 그런 그가 보다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미국의 나약대학교와 컬럼비아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학사·석사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만약 제가 어린 시절의 불행 없이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면 당연히 아프리카는 가지 않았을 것이며, 가출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 일어난 모든 나쁜 일도 저라는 사람의 인생을 알차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로 국제무대에서 활동해온 그가 지난해 한국을 찾았다. 그 이유는 평신도 선교사로서 NGO 활동과 사회복지 영역에는 베테랑 수준의 경력을 가지고 있지만, 선교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생각에서다.

보다 성경을 깊이 공부하고 선교적 시각을 넓히기 위해 올해 3월부터 백석대 신대원 기독교선교학 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김 선교사는 “현장에서 다른 선교사들에게 사회복지를 가르치고 있는데, 제가 아직 이론적으로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부분이 선교학인 것 같았다”며, “NGO와 사회복지, 선교학, 이 세 분야에 대해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지원하게 됐다”고 말했다.

국내 유수의 신학교를 제쳐두고 백석대 신대원에 지원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학교를 놓고 몇 년간 기도하면서 여러 다른 신학교를 알아봤지만, 고민이 됐고 여건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의 소개로 백석대에 등록한 뒤 모든 입학과정이 순조롭게 이뤄지는 과정을 보면서 내가 가야할 곳임을 확신하게 됐다”고 말했다. 수업 현장에서도 단순히 이론적 지식에 대한 가르침을 넘어 실제 현장에서 피부로 와 닿을 수 있는 양질의 교육을 실시한다는 점에서 큰 만족감을 표현했다. 

또한 그는 지난 2018년 10월 그는 ‘김해영커넥트주식회사’를 설립해 전문 사회복지 사업에 뛰어들었다.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로 파송돼 활동했던 자신의 경험을 살려, 한국에서도 자신의 직업을 갖고 사역하는 전문인 선교사를 양성하기 위함이다. 이후 사업을 아프리카 케냐로 확대해 실시할 예정이다.

“여전히 저의 꿈은 선교이고, 제 시선은 가난과 무지, 질병으로 고통 받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향해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내버려진 어린 김해영이 오늘 이 세상에도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 삶 전체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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