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선 참호까지 목사님의 따뜻한 손길이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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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선 참호까지 목사님의 따뜻한 손길이 전해졌습니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9.06.25 1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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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69주년 ‘전장에서 선포된 말씀’

한국전쟁 당시 미 군목 참전·한국군 군종제도 창설
총 대신 성경 들고 전장 누비며 병사에게 소망 전해

1943년 2월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이던 군함 도체스터호가 어뢰에 맞아 침몰되고 있었다. 갑작스런 어뢰공격에 구명복을 입지 않고 있는 수병들은 수장될 위기에 처했다. 배에 타고 있던 폴링 군목은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복을 나눠주고 구명보트에 타는 것도 양보했다.

침몰 직전 조명탄을 발사하고 구명복을 입지 않은 채 그는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훗날 폴링 목사의 어머니는 자신을 찾아온 생존 수병들에게 “우리 아들이 군목으로 지원했다고 해서 울고 있는 내게 ‘제가 고생하지 않도록 기도하지 말고 올바로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폴링 목사는 기도한 대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가 전장에서 보여준 신앙과 모범은 복음으로 수병들에게 전해졌다. 폴링 목사와 같이 전쟁터에서 군인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했던 군종목사들은 69년 전 한국전쟁 참상의 한복판에도 있었다. 전장터에서 군종목사들은 장병들이 공포를 이겨내고 천국에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말씀을 심었다. 그 군종목사들을 기억해야 할 책임이 한국전쟁 69주년을 보내는 한국교회에게 있다. 

▲ 미군 제31연대가 6.25 전쟁 중 군종목사 인도 아래 야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 군종목사 13명 희생돼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남한 전역이 공산화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아는 대로 유엔군 참전이 결정적이었다. 특히 미군은 연인원 최대 180만명이 참전하고 33,628명이 전사했으며 10만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미군 장병들이 가는 전장마다 동행하고 기도해주었던 군종목사들이 있었다. 미군에서 군종목사 제도가 만들어진 지는 250년 가까이 된다. 1775년 대륙회의 결의에 따라 만들어졌다. 군화를 신은 목자, 군목들은 비전투요원으로 총 대신 성경을 들고 전장을 누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 내 남아있던 군목은 706명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역시 군목들은 참전했고, 그 중 한국전쟁에 가장 먼저 투입된 이는 칼 R. 허드슨 목사였다. 또 가장 먼저 전사한 군목은 미 제24보병사단 제19 보병연대 소속의 헤르만 G. 펠로텔러였다. 대전 금강전투에서 미군 방어선이 무너지자 낙오된 부상병을 안고 기도하다가 북한군 수색대에게 발견대 30여명의 병사들과 함께 현장에서 37세 나이에 총살됐다. 

제25보병사단 제35보병연대 군목 바이런 리 목사는 1950년 7월 인민군 전투기 폭격으로 사망했다. 

두 목회자처럼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미군 군종목사는 무려 13명에 달한다. 제19보병연대 케네스 히슬로, 제2보병사단 제2보병대대 웨인 버듀 등 군목들은 포로가 되었고 또 다른 군목들은 포로가 된 후에도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그들은 낯선 땅에서 총을 들고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 대신 총탄이 빗발치는 참호를 찾아다니고, 언제든 기습공격을 받을 수 있는 주둔지 천막 예배당에서 병사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 죽어가는 장병들에게 달려가 천국의 소망을 알려주고 주님의 평안 안에서 생을 마감하도록 도왔다. 전장의 공포 속에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조국을 지켜야 하는 의미와 사명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했다. 

▲ 국군 장병들이 야전 천막 예배당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여들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 “하루속히 군목을 군대에”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우리 군대 조직에는 제도적인 군종목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효시는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 목사의 아들이자 대한민국 해병대를 창설한 손원일 제독이 1948년 이화여고 교목이었던 정달빈 목사를 해군장교로 삼아 최초로 군종업무를 관장하게 한 것이 시작이다. 정 목사는 1949년 용산 군인관사에서 최초의 군인교회 ‘용산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를 드렸다. 

육해공군 안에서 군종목사 제도 필요성은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정작 6.25 발발 때까지 군종병과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그해 미군부대에 배속되어 있던 병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편지로 건의하면서 군종병과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다. 
미군 제30사단 10공공대대에 근무하던 카투사 병사는 “성직자가 군에 들어와 전투에 임하는 장병들의 가슴을 신앙의 철판으로 무장시키고 기도로 죽음의 두려움을 없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내용의 편지를 띄웠다. 

1950년 12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비서실 국방신 제29호 지휘를 내렸다. 문서에는 “군종목사가 각 군대에 다 들어가서 일하고 있는 줄로만 믿고 있었는데 아직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면 하루 속히 사람을 택해서 들어가서 일을 하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 서위렴 목사(William E. Shaw)와 천주교 조지 캐롤(George Carroll) 주교, 그리고 미군 극동사령부 군종과장 이번 베넷(Ivan L. Bennett) 목사가 미군과 한국 정부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했다. 이런 노력으로 대한민국 군대에도 군종병과가 만들어진 것이다. 초창기 1951년부터 1952년 6월까지 군종목사 56명이 무보수 촉탁 신분으로 각 부대에 배치돼 장병들의 신앙을 돌보았다. 1952년 6월 16일 139명의 군목이 무보수 촉탁 신분에서 문관으로 변동되어 급여를 받을 수 있게 됐다. 

“병사들을 지켜달라고 기도만 할 수밖에”
6.25 전쟁에 참전했던 육군 군목 1기 28명은 모두 하나님 품에 안겼다. 1951년 2월부터 1953년 4월까지 투입된 군목은 270여명으로 6개월 이상 참전한 군목 중 생존자는 30여명에 불과했다. 

한국전쟁 당시 참전 군목들은 이제 고령이지만 전쟁의 기억만은 또렷하다. 1952년 후반기 군목에 합격한 후 전후 중령으로 예편한 샘골교회 백만기 원로목사는 전방에서 공포에 몸을 떠는 어린 병사들의 손과 어깨를 잡고 하나님께서 지켜달라고 같이 기도했다고 회고했다.  

1953년 31살 나이로 군목으로 참전한 수원남부교회 채규락 원로목사 역시 “우리 군대가 승리하고 병사들이 죽지 않도록 손을 잡고 눈물로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같은 해 26살 나이로 군목시험에 합격했던 김재근 원로목사는 다양한 병사들을 치유하는 데 목사님들이 간여했고, 피난민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했다고 기억했다. 

1956년 당시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이 군종제도 설립과정을 언급한 내용을 보면 당시 군대는 군종제도를 그저 성가신 것으로 여기는 듯 보인다. 하지만 고정관념은 이내 바뀌었다. 

“전쟁을 수행하며 짐이 될 것 같아 곤란하다고 보고했지만 대통령께서 다시 생각해보라고 지시해 우선 후방기관에서 실험해 보았다. 그 결과 군목의 필요성을 크게 느꼈고, 군목제도가 창설된 후에는 제일선 참호까지 그들의 따듯한 손이 미쳤다. 나는 전쟁이 가장 치열할 때 제일선 진영에서 오랫동안 군목과 함께 지낼 수 있었고, 아무리 위태한 때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확신하게 될 때 모든 일을 질서 있게 진행할 수 있었다. 또한 사병들은 군목을 자부와 같이 믿고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보관 중인 한국전쟁 중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천막에 모인 병사들의 사진 한 장이 남아있다. 참호와 누더기 같은 천막 위에 간신히 세운 작은 십자가와 그 아래 모인 병사들이 깊은 잔상으로 남는다. 서른 명 조금 모자란 장병들 중 누가 생존하고 누가 전사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에게 현장에 함께있던 군종목사는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안내자였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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