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正義)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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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正義)의 이름으로?”
  • 강석찬 목사
  • 승인 2019.05.1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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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찬 목사/예따람공동체

2,000년 전 유대의 로마 총독 빌라도는 잡혀온 죄수를 심문하다가, 죄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 질문했다. 그 당시 권력의 최고 높은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가, “내가 진리다.”라고 한 예수님께 던진 물음이다. 그런데 요즘 멍청한 질문이 될지 모르겠지만 예수님께 “정의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싶다.

요즘 신문을 장식하는 뉴스를 종합하면, 온 나라가 둘로 나누어진 것 같이 보인다. 시론의 주제로 다루기에 예민한 문제이긴 하지만, 현상을 부정할 수 없다. “진보와 보수”의 대결장이 된 정치판이 온 사회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교분리를 주장해 온 교회라고 해도 예외 없이 영향을 받고 있다. 진보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촛불’에게 물어보면, ‘나라 사랑’ 때문에 나선 것이라고 한다. 보수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태극기’에게 물어보아도, ‘나라 사랑’ 때문에 나섰다고 한다. 두 세력이 극(極)을 향할 때 극좌(極左)라고 하고, 다른 쪽을 극우(極右)라고 부른다. 극좌와 극우에게 둘의 접촉점은 없다. ‘가운데’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괜스레 “나는 가운데야”하면, 금방 박쥐로 취급된다. 참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어느 쪽도 ‘나라 사랑 때문’이라고 하는데, 나라와 민족이 찢어지고 있어도 ‘나라 사랑’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결국 자신의 정의(正義)로 상대방은 불의(不義)라고 규정하는 셈이다. 어제의 정의가 적폐(積弊)로 전락하게 된다. 불의를 용납하고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인류 역사의 교훈이다. 그래서 정의로운 세상을 외치면서 불의를 척결(剔抉)해야 한다고 폭력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게 된다. 놀랍게도 사랑으로 시작된 일에 정의를 세우기 위해, 불의를 제거하기 위한 폭력이 정당화된다. 결국 오랜 세월 동안 친밀했던 인간관계가 깨어지기도 하고, 억울하게 다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한다. 이런 정의가 올바른 정의일까?

그리스 신화에 두 명의 여신이 등장한다. 법(法)의 여신 테미스(Themis)와, 테미스의 딸인 정의의 여신 디케(Dike)이다. 이 여신들은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왼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칼은 법과 정의를 엄정하게 구현하고, 진실을 거짓으로부터 엄격하게 구별해 내겠다는 각오의 표현이다. 저울은 어느 쪽으로도 조금도 치우치지 않는 공정함의 상징이다. 법을 다루는 기관에는 정의의 여신상을 법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15세기 말부터 여신의 눈을 가리게 된다. 인종, 계급, 성별에 상관없이 정의를 구현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나라 법원의 로고는 정의의 여신인 디케가 오른손으로는 법전(法典)을 폼에 안고 왼손으로는 저울을 들고 있다.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은 어떨까? 경찰의 로고는 참수리가 태극기를 품은 무궁화 위에 날개를 펴고 있다. 자세히 보면 날개 사이에 저울이 있다. 불법자를 잡는데 참수리의 눈과 부리를 사용하지만, 역시 저울의 공정성을 잃지 않겠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만약 이 저울이 정권에 따라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진다면 정의롭지 못한 세상이 된다. 이런 뜻에서 법을 다루는 기관은 정치권력의 하수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저울을 기울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 때문에, 사랑의 이름으로 분열과 증오, 격렬한 투쟁, 미움과 폭력이 증가하고 있는데, 오늘 우리의 교회는 어떤 정의에 서야 할까?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하게 된다. 교회 안에도 촛불과 태극기가 공존(共存)하고 있는 현실에서, 교회의 정의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예수님의 정의는 무엇일까? 정의를 완성시키는 길은 사랑이다. 인간애가 폭력적인 정의보다 귀중하다. 분열을 조장하는 이념보다 더 소중한 것이 사랑이다. 5월 가정 달에, 시류에 휩쓸려 잃어버리고 있는 것을 되찾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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