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구원을 향한 열망으로 ‘사회적 신앙운동’ 일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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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구원을 향한 열망으로 ‘사회적 신앙운동’ 일으키다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9.05.14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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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 옥고에도 지조를 지킨 오화영 목사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오화영 목사는 매우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일제시대 당시 그는 세 번의 감옥생활을 했지만,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1919년 3.1독립선언서 서명한 33인의 민족대표 중 한사람으로 구속된 후에도 1929년 광주학생사건, 1938년 흥업구락부사건 등에도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1945년 해방 후에도 혼란스러운 조국을 온전히 세우기 위해 구국일념으로 정계에 투신해 국회의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선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납북됐으며, 이후 자세한 그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에 들어서야 그의 묘가 평양 신미동에 위치한 애국열사릉에 매장됐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 독립지사 오화영 목사는 세 차례 옥고를 치르면서도 민족독립을 향한 열망을 거두지 않았다.

‘민족구원’을 향한 타고난 열망

국사(菊史) 오화영은 27세가 되던 1906년 5월, 남감리회 파송 미국선교사 크램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됐다. 이후로 그의 신앙은 날로 두터워졌으며 감리교회 협성신학교에 진학해 개성 북부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며 목회자의 꿈을 키운다.

그는 1914년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남감리회의 7개 교회 중 가장 규모가 큰 교회였던 종교교회로 파송을 받아 1918년 종교교회의 공식적인 담임목사가 된다. 1910년 한반도가 일제에 강제로 병합되면서 오화영은 당시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조국의 상황에 안타까워했으며, 조선 독립에 대한 기대와 책임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의 바람을 어떻게 실현해야 할지 몰라 안타까워하던 차에 원산에서 목회하던 동료목회자 정춘수를 만나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목회자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민족의 구성원으로써 독립운동에 동참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 그는 3.1독립선언서에 33인의 민족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게 된다. 선언식 후 민족대표 33인은 총독부와 종로경찰서에 나온 관헌들에게 체포돼 남산 왜성대 경무청에 연행된다. 이후 연행 13일 만에 검찰에 구속기소 돼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다. 재판과정에서 자신이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 연유를 상세히 밝힌 오화영은 ‘이후에도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이냐’라는 일본 검사의 질문에도 ‘기회만 있다면 할 것’이라며 마지막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결심공판을 통해 그는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으며 미결수로 복역한 기간까지 포함해 3년 2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세 번의 옥고 이후에도 지조 지켜

1922년 만기 출옥한 그는 같은 해 9월, 종교교회로 파송 받아 부임했다. 이제 그의 시선은 교회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상 밖으로 향하게 된다. 기독교인으로서 교회뿐만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서도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적극적으로 고민하게 된 것이다. 동아일보를 통해 전한 그의 출옥소감을 통해서도 영적·사회적으로 더욱 성숙해진 그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 “내가 일찍이 교역자 생활을 여러 해 하였으나 이번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같이 영적 감응(感應)을 얻은 일은 없었다…(중략)…조선인에게 제일 급한 것은 교육이나 우리 모두 그 방면으로 힘을 써서 배우고자 하되 학교가 없는 현상을 구제해야 할 것이다.”

이후 대외활동을 활발히 펼치게 된 그는 1923년 서울에서 열린 조선물산장려회의 발기준비위원회에 참여해 계몽운동을 펼쳤으며, 1926년 10월 말 열린 조선민흥회 창립총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듬해 열린 신간회 창립대회에서는 간사로 선출돼 서무부장, 경성지회 검사위원에 선임됐다. 1929년 6월 창립된 기독신우회의 평의원으로 참석해 기독교인의 사회참여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이렇게 교회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보니 그는 일제로부터 줄곧 감시와 견제를 받아왔다. 그가 신간회에 깊이 관여하면서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사후대책을 논의하던 중 두 번째 옥고를 치르게 된다.

오화영은 1931년 출소한 이후 이듬해인 1932년 전덕기·최성모·주시경·김구 등 수많은 민족주의자들을 배출한 교회인 상동교회 담임자로 파송 받았다. 2년간 상동교회에서 목회를 마치고, 1935년 수표교교회 담임목사로 다시 파송됐다. 하지만 심신이 지쳐 더 이상 제도권 목회를 하기 어려웠던 그는 1937년 중부연회에서 퇴회해 수표교교회에서 본처목사가 되면서 목회생활을 쉬게 된다. 그러나 1939년 항일비밀결사조직인 흥업구락부 사건이 밝혀지면서 오화영은 다시 일제에 의해 실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전향서를 쓰고 풀려나 친일로 돌아선 인사들도 많았으나 오화영은 끝까지 지조를 지켰으며,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구국일념으로 정계에 투신

1945년 해방 후 오화영은 전격 정계에 투신해 안정된 민족공동체를 세우고자 했다.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조선민족당 당수, 정당통일 기성회 회장, 한중협회 회장 등을 비롯해 1946년에는 신탁통치반대총동원회 위원, 민족청년당 전국위원, 비상정치회의 위원,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정무위원 및 외교협회 이사 등 수많은 요직을 거치며 혼란스러운 시대적 과제를 수습하고자 했다.

1950년 5월 30일에는 제2대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서울 종로 을구)되었으나 다음해 발발한 6.25한국전쟁 이후 납북되면서 이후 그의 자세한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2천 년대 들어서야 그의 묘가 평양 신미동에 위치한 애국열사릉에 매장됐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묘비를 통해 그가 서거한 날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오화영 목사의 묘비에는 ‘1879년 4월 5일생, 1960년 9월 2일 서거’라는 글자가 선명히 남겨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그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오화영 목사가 이렇게 목사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구국운동에 나설 수 있던 배경으로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는 “오화영은 기독교민족주의 사상으로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라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3.1운동은 민족 독립운동이며 동시에 민족구원 신앙운동이었다. 국권을 상실해 시민의 기본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민족과 국가의 권리를 찾는 것을 국가구원의 신앙운동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오화영은 3.1운동 당시 독립운동 조직에 영향을 미쳤으며, 기독교-천도교 연합의 거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이끄는데 있어 큰 공헌을 했다는 진단도 나왔다. 최태육 박사(목원대·/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 사무국장)는 “오화영 목사는 개성이나 원산 등 지방교회 대표들을 만나 독립운동의 열망을 고취시켰으며, 3.1운동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인사가 연합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며, 독립만세운동의 조직화에 있어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그는 3.1운동을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운동으로 이끄는데도 핵심적 역할을 했다. 처음 3.1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각각 단독으로 진행하고자 했지만, 천도교측에서 먼저 연합운동을 일으키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기독교 인사 측의 반발이 거센 상황에서 이승훈 장로를 비롯해 오화영 목사는 ‘우리는 이 기회에 종교와는 관계없이 국민의 자격으로 할 것이다’라는 강력한 발언에 나선 것이다. 그의 발얼이 관철돼 3.1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 합작의 전국적 민족운동으로 펼쳐지게 된다.

최 박사는 “3.1운동 방식과 관련해서도 천도교는 선언과 시위, 기독교 일부 대표는 일제에 청원하는 것을 주장했다. 그로인해 협업이 깨질 위기에서 오화영을 비롯한 기독교 대표들은 선언을 주장해 받아들여졌다.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오화영 목사가 큰 역할을 했기에, 3.1운동이 결국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민족사적 과제 앞에 흔들림 없는 결정을 내렸던 목사 오화영의 삶은 오늘날 시대적 과제 앞에 기독교계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묻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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