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이 있는 믿음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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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이 있는 믿음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것”
  • 김수연 기자
  • 승인 2019.04.14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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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꿈꾸었던 조국,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 ⑦ 행동하는 신앙인, 근곡 박동완

“살을 에이고 저미는듯하던 세찬 겨울바람도 이제는 부드럽고 온화한 봄바람이 불어온다. 아침 군생만물이 다 기뻐하는 희망의 때가 돌아온다. 인생인들 슬픔에서 기쁨에, 고통에서 쾌락에, 눌림에서 자유에 기쁜 때가 이르지 아니할까 보냐.”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근곡 박동완 선생이 지은 시 ‘봄의 노래’ 일부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도 독립운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그는 침울했던 민중들의 가슴에 소망을 심어줬다.

무궁화가 피어난 골짜기, 즉 삼천리 화려강산을 뜻하는 ‘근곡’(槿谷)이란 호에서 엿보이듯 박동완 선생은 무척이나 겨레를 사랑했다. 유복한 양반가 출신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에 뛰어든 그는 독립지사로서, 나아가 기독언론인과 교육목회자로서 한평생 민족구원의 외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언제나 투철한 ‘신앙심’과 ‘비(非)타협’이란 불굴의 의지가 있었다. 그렇다면,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대한독립과 사회변혁을 꿈꿨던 박동완 선생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정신적 유산은 과연 무엇일까.

독립운동 이끈 ‘민족주의 신앙’
박동완 선생은 1885년 경기도 포천의 양반관료 가문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여유로운 가정환경 덕분에 5살 때부터 한문을 배운 그는 양사동소학교에 입학해 신교육을 받았다. 이후 한성중학교와 한성외국어학교를 거쳐 배재학당 대학부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동시에 정동제일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현순·손정도·이필주 목사 등과 교류한 박동완 선생은 ‘민족주의 신앙’을 전수받았다. 곧 ‘복음’을 최고 가치로 여긴 그는 구원관을 개인에서 민족으로 넓히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던 박동완 선생이 35살에 민족대표로 나선 결정적 계기는 미국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에 깊이 공감하면서다. 당시 언론인으로서 국제정세에 밝았던 그는 조선 또한 일제치하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것이 당연하고 생각했다. 결국 박동완 선생은 부르주아의 삶을 내려놓고 소시민의 삶을 선택, 자발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결코 누군가의 제안이 아닌, 오롯이 본인의 믿음과 신념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 그렇게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진 그는 일제에 체포됐다.

그러나 일제의 고문과 협박은 박동완 선생의 기개를 꺾지 못했다. 평소 일본의 표준시간에 맞춰 살지 않겠다며 자신의 시계바늘을 30분 늦춰 놓고 다녔다는 일화가 말해주듯,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려 애썼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도 박동완 선생은 “조선의 독립이 꼭 될 줄로 생각 하느냐”는 경찰의 신문에 “그렇다. 조선인도 지식이 향상됐으므로 독립하면 훌륭한 자치가 될 것”이라면서 심지어 “앞으로도 독립운동에 또 참여할 것”이라고 분명히 대답했다.

▲ 1919년 민족대표 33인이 작성해 낭독했던 독립선언서. 선언서 좌측 민족대표 33인 명단의 3번째 줄 우측에서 5번째 박동완 선생의 명단이 기록돼 있다.

민중 계몽에 힘쓴 기독언론인
일제에 대한 박동완 선생의 항거는 출옥 후에도 계속됐다. 1915년부터 3.1운동으로 감옥에 수감되기 직전까지 ‘기독신보’의 주필 겸 편집인으로 활약했던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극심했던 육체적 고통과 일제의 감시에도 아랑곳 않고 문필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1925년경까지 ‘신생명’ ‘한인기독교보’ ‘청년’ ‘별건곤’ 등에서 다양한 장르의 글을 기고하며 오랜 식민 상태로 낙망한 조선인들의 항일정신을 고취시키고 교회의 잘못을 지적했다.

물론 박동완 선생의 글은 늘 일제의 신경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가령 기독신보의 ‘우리 생활의 현상’이란 사설에서는 일제의 만행을 지적하고, 이에 침묵하는 종교계의 무사안일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처럼 박동완 선생은 언론을 통해 강대국이 약소국을 약탈하는 것은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의 섭리에 위배되며, 예수님의 사랑만이 모든 분쟁을 해결할 유일한 열쇠라고 강조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이순자 책임연구원은 “박동완 선생은 국권을 빼앗긴 조국의 현실 속에서 예수 믿는 자의 삶을 고민한 복음의 사람이었다. 특히 ‘행함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임을 몸소 보여준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글로만 대한독립을 외칠 수 없어서 절필을 하면서까지 독립운동에 직접 가담했다. 언론에 사상을 말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몸소 실천한 것”이라면서 “언행이 일치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진정 살아있는 기독교를 실현해낼 수 있다”고 전했다.

하와이 망명에도 ‘교육목회’ 지속
한편, 박동완 선생은 정동제일교회 전도사 시절부터 ‘주일학교’에도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그는 조선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아동과 청년을 상대로 한 ‘교육’이라고 봤다. 조국의 미래를 선도할 아이들이 성별·계급에 상관없이 균등한 교육을 받아 올바른 인격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지론이었다. 이에 그는 기독신보에도 ‘주일학교란’을 만들어 각 학생의 재능과 성격에 따른 맞춤교육 필요성 및 교사 역할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또 1923년에는 정동제일교회에서 국내 최초로 여름성경학교를 개최해 전국적 확산에 기여했다.

주일학교 교육에 대한 박동완 선생의 열정은 1928년 하와이로 망명한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비록 일제의 방해로 국내활동에 한계를 느껴 떠났지만, 그에게 하와이는 여전히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로써 조선의 연장이었다. 이곳에서 와히아와 한인교회 초대담임목사로 부임한 박동완 선생은 ‘한글학교’를 열어 한인 2세들을 하나로 모으고 한국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며 민족의식 함양에 힘썼다.

이후 1941년 이역만리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순회사역 등 목회에 전념하면서 고국을 잃은 한인들의 아픔과 슬픔을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훗날 그의 제자와 성도들은 “박동완 선생은 혼자 살면서 사례금도 받지 못하는 형편 가운데서도 목회를 포기하지 않았고, 병중에 있을 때도 교회 헌금의 일부는 꼬박 한국의 미자립교회 후원금으로 보냈다”고 증언했다.

‘근곡 박동완의 생애와 기독교 민족주의 연구’를 펴낸 박재상 저자는 “교회뿐 아니라 ‘사회’에서 필요한 인재를 길러내려 했던 박동완 선생은 ‘나무를 심는데도 150년을 내다보는데 하물며 사람을 바꾸려면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했다”면서 “주일학교에 전심전력하기를 해외 선교사 파송하는 것보다 더하라던 그의 가르침 앞에 나날이 다음세대가 줄어드는 한국교회의 현실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임미선 공동저자는 “그는 모든 것을 잃을 각오로 망명해 소박한 목회와 독립운동에 전념하다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면서 “박동완 선생의 삶은 분열과 갈등에 늪에 빠지고, 역사의식이 부족하고, 세속화된 작금의 한국교회 세태에 경종을 울린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부패와 타락으로 얼룩진 현대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은 빛과 소금이 되는 책무를 고민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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