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구원은 독립과 동일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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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구원은 독립과 동일한 의미”
  • 이성중 기자
  • 승인 2019.04.03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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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회 - ‘그들이 꿈꾸었던 조국,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 ⓹ 민족대표에서 임정요인으로 활동한 구국운동 실천가 - 김병조 목사
▲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사료편찬위원회 위원들. 두번째줄 왼쪽 첫번째가 김병조 목사다.

개화기 교육운동에 참여, 민족대표 33인중 개신교 목사로 서명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활동, 해외독립운동 기지 확장 주력

한국교계는 3·1운동 백주년을 맞기까지 만세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민족대표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심한 교파의식과 더불어 일부 인사가 북한교회 출신이다 보니 그에 대한 사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도 있다.

일재 김병조 목사 또한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이며 독립 후 북한에 남아 있다가 소련군정에 체포되어 수감 중 순교한 인물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 시절 “구원은 민족의 독립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는 소신을 갖고 독립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면서 구국의 신념의 길을 걸어왔다. 김병조 목사는 애국계몽의 교육사업가로 ‘국민교육이 곧 애국의 길’이라 생각으로 근대식 교육기관을 설립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민족대표 33인중 개신교 목사로 서명에 참여하였으나, 1919년 3월 1일 태화관의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지 않은 4인중에 포함되다 보니 그의 삶을 민족운동으로 조명하는데 다소 제약이 있다.

하지만 김병조 목사는 평북 정주군을 중심의 애국계몽 운동,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활동, 항일 역사자료 출간, 만주에서의 선교활동과 더불어 다양한 무장운동 단체들과 연계된 활동을 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지 않았으며, 그가 소천한지 40년만에야 정부로부터 공로가 인정됐다.

 

민족계몽운동에 주력

1877년생으로 평안북도 정주군 동주면 출신인 김병조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입학하기 전까지 애국계몽 운동에 주력했다. 그는 1908년 정주지역에 있던 서당을 폐지하고 변산(辨山)학교를 설립, 근대식 교육을 시작했다.

근대식 학교의 설립에 대해 김병조 목사는 “나라 망국의 원인이 퇴락한 유교사상과 국민의 무지에서 비롯되었으며, 국민계몽이 곧 애국”이라고 강조했다. 김병조 목사는 1909년 서북학회 구성지회 회장에 피선되는 등 계몽운동을 통한 근대식 교육 방식을 인정받기도 했다.

개화기 서북지방은 한국 개신교 역사의 전초기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김병조는 먼 친척인 김이련, 김관근 부자로부터 복음을 접했지만 김병조는 삼강오륜의 유교가 월등한 종교임을 내세워 배척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관근으로부터 꾸준히 복음을 접한 김병조는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정주군 방현면에서 발생한 화재로 가옥 80여 채가 전소하고 많은 이재민 발생하자 기독교가 나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유교에도 없는 만민평등, 박애주의가 기독교에 있음을 깨닫고 복음을 영접했다.

 

목사 안수, 3.1운동과 민족대표에 참여

이후 복음을 영접한 김병조가 목회의 길을 택한 결정적인 계기가 발생했다. 일제는 1911년 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를 ‘데라우치총독암살사건(일명, 105인 사건)’으로 엮어 황해도와 평안도를 중심으로 많은 기독교 인물을 투옥시켰다. 이를 계기로 한문 교사였던 김병조는 장래 일을 도모하기 위해 목사가 될 것을 결심, 1913년 2월 선천 남교회에서 열린 제3회 평북노회에서 노회추천으로 평양신학교에 입학, 1917년 6월 제10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이듬해인 1918년 8월 제14회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당시 조선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기독교인들은 국내외에서 적극적인 민족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했다. 1918년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만국평화회의에 한국대표로 파견했으며, 장덕수를 일본에, 여운형, 선우혁, 김철, 서병호를 국내에 파견, 국내외 정치, 경제, 사회 종교계를 망라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의 방법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이에 영향을 받은 김병조 목사는 흥사단원인 선우혁, 이승훈과 함께 1919년 2월 11일 서울에서 최남선, 송진우와 만나 독립운동에 기독교계의 참가를 약속한 뒤 동지들을 규합, 자신을 포함, 양전백, 이명룡, 유여대 등 4인과 함께 ‘기독교 민족대표’로 동참을 결의했다.

김병조와 유여대는 이승훈을 전적으로 신임, 서명을 위한 인장도 그에게 위임하는 등 적극적인 민족독립 운동에 앞장섰다.

하지만 그는 1919년 3월 1일 태화관 독립선언식에는 참여를 하지 못했다. 거사당일 평북지역에서의 시위와 독립선언서 배포 등의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후 김병조 목사는 비밀기관의 도움으로 안동을 경유하여 상해에 도착, 조선의 독립운동을 해외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임시의정원과 한인목회 활동

상해에서 김병조 목사는 임시정부 의정원에 들어가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의정원에서 외교관계 문서작성과 역사편찬 등 주로 언론 홍보활동에 집중했다. 더불어 한인교회 목회·교육·저술활동 등 다방면에 걸쳐 해외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김병조 목사가 맡은 임무는 당시 초기 임시정부 활동 중 외교노선에 비중을 둔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임시정부는 의정원 5차 회의에서는 안창호의 적극 제의로 국제연맹에 제출할 ‘청원서’를 작성 심의할 기구로 ‘국제연맹회제출안건작성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에는 김병조 목사를 비롯해 오의선·최창식·정인과·이춘숙 등이 참여했다.

또한 1919년 5월 23일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이 파리에 파견되는 것에 맞춰 김병조 목사 외 10인의 연서로 ‘국제연맹회와 장로교만국연합총회 및 미주 각 교회’ 앞으로 ‘한국시사진술서’를 발송하여 국내의 상황을 알렸다.

더불어 김병조 목사는 손정도 목사와 함께 ‘한국기독교대표들이 중국기독교에 고하는 글’을 작성하여 조선독립의 필요성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한편 김병조 목사는 3·1 만세운동 이후 한국 독립운동사의 체계적인 정리를 위해 구성된 ‘임시사료편찬위원회’에도 참여했다. 이때 수집된 사료를 바탕으로 김병조 목사는 1921년 ‘한국독립운동사략’을 별도로 저술했다. 총 17권으로 구성된 사략은 ‘한국독립운동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책의 내용은 1894년부터 1920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외세의 침입과 민족 저항운동의 관점에서 서술, 당시 독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김병조 목사는 “자신은 역사가가 아니지만 개국 이래 첫 대업인 독립운동의 염원과 이를 위해 누군가 목숨을 맞바꾸는 인의(仁義)에 침묵할 수 없어 저술했다”며 사략발간과 관련해 강한 민족의식을 표현하기도 했다.

특히 이 사료에 기록된 내용 중 3·1만세운동의 각 지역 상황과 배포된 독립운동 선언문 18종이 수록되어 사료적 가치로서도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김병조 목사의 독립운동에 관한 의지와 결의는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통해 발표된 다수의 글들에서도 확인이 된다. 특히 친일파, 부일세력을 규탄하며 쓴 ‘경고관헌문’(警告官憲文)이나 조선의 완전한 독립과 일제 구축의 소원이 담긴 ‘기도’(祈禱)는 목사 안수를 받기 이전 애국계몽운동 때부터 가지고 있는 독립에 대한 강한 열정의 표현이기도 했다.

임시정부 의정원 활동과 더불어 김병조 목사는 한인목회를 비롯해 교육사업, 거류민단, 대한적십자회 등 임시정부와 관련된 다양한 방계조직에서도 활동을 병행했다.

특히 임시정부 의정원과 가까이에 있는 상해한인교회는 김병조 목사를 담임목사로 선출했다. 이에 송병조, 손정도 목사를 비롯해 의정원 관계자들이 주요직분을 맡으면서 상해한인교회를 중심으로 섬겼다.

 

선교와 독립투쟁, 그리고 투옥

상해 의정원 활동이 끝난 후 김병조 목사는 1924년부터 해방 전까지 만주에서 선교와 독립운동을 병행했다. 특히 만주선교의 경우 한인 이주민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목회 및 선교활동에 집중했으며, 더불어 지하비밀결사대인 ‘반공광복단’등 다양한 무장운동 단체들과 활동을 이원화하면서 투쟁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일제 패망 이후 1946년 12월 ‘반공광복단’ 조직 활동이 탄로나면서 김병조 목사는 평북 정주에서 주모자로 체포되어 소련군특무사령부로 이송 되어 시베리아 수용소를 거쳐 1949년 바이칼 호 수용소에 유배되어 수감 생활을 하던 중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김병조 목사는 소천 이후 항일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 1952년 대한민국정부로부터 순국선열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1962년에 해방 후 북한에 잔류했다는 이유로 훈장 추서가 보류되기도 했다. 하지만 유족들이 끈질긴 노력으로 그가 반공주의자라는 증명을 함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3·1절을 맞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에 추서됐다.

성균관대 고지수 교수는 “김병조 목사의 활동이 3·1 만세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민족대표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가 해방이후 북한에 남았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지만 김병조 목사는 일제시기 평북 정주를 시작으로 상해, 만주에서의 반공활동과 신념은 해방 후 북한에서의 비타협적 반공운동과 괴리되지 않은 일관된 결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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