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막 인생 중 3막이 끝났을 뿐, 선교로 4막 인생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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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막 인생 중 3막이 끝났을 뿐, 선교로 4막 인생 시작합니다”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9.03.12 13: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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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 목회 마치고 새출발하는 평택은실교회 원로 홍태희 목사

고등학교 때 성령 체험 후 목회의 길… 새벽 2시에 하루 시작
배추 팔아가며 성도들과 ‘신협’ 세워 가난한 시절 함께 이겨내

복음전파와 말씀선포에 일생을 바친 평택 은실교회 홍태희 목사가 강단을 떠났다. 1966년 10월 3일, 전도사로 교회를 개척해 햇수로 52년이다. 강산이 다섯 번 바뀔 동안 그는 한결같았다.

▲ 평생의 목회사역을 모은 ‘그림으로 보는 한 인생의 5막 인생’으로 펴내기 위해 모아놓은 자료들을 살피고 있다. 홍태희 목사의 52년 목회여정은 개인의 역사이자 교단의 역사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따르지 않았고, 법이 정한 정도만 걸었다. 선배가 남긴 발자국이 후배가 따라올 길이 라는 생각에 그는 늘 철두철미하게 자신을 점검했다. 그렇게 정성을 쏟은 평택은실교회 강단을 떠났다. 마지막 길 역시 말씀과 은혜, 법과 원칙 속에서 마무리 했다. 지난달 23일 원로 목사에 추대된 홍태희 목사는 “나는 이제 인생 4막을 시작한다”며 새 출발을 알렸다. 그 의 말대로라면 ‘5막 인생’에서 이제 겨우 3막 이 끝났을 뿐이다. 홍태희 목사의 인생 4막은 그동안 못다한 선교로 채워질 계획이다.

성도들 만장일치로 원로목사 추대 “사실 은퇴는 지난 연말에 했어요. 총회 법에 따라 생일에 해당하는 해 마지막 달까지만 사역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은퇴할 때까지 후임이 세워지지 않아서, 법에 따라 임시 당회장을 세우고 후임자 선출 절차를 마무리했죠. 그렇게 정성을 기울인 결과 참으로 좋은 후임자가 오셨습니다. 형제 4명이 모두 목회자로 있는 믿음의 가정이더군요.” 홍태희 목사가 평택은실교회에 부임하고 48년이다. 오랜 세월 홍 목사와 함께 한 성도들 입장에서는 사실 후임을 뽑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홍 목사는 단호했다.

여러 지역 출신을 검증하는 ‘탕평책’을 제안했고, “잘 부탁한다”는 청탁이 있는 후보는 배제하기로 했다. 교단 신학인 ‘백석 대 신대원’ 출신이어야 하며, 건강검진과 범죄사실확인증명도 제출하도록 했다. 성범죄와 음주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서류뿐만 아니라 면접도 까다로웠다. 청빙위원회 면접 후에 관주가 없는 성경을 놓고 40분 동안 A4 4매 분량의 설교를 작성하도록 했다. 이렇게 작성된 설교와 자유설교 2편으로 성도들 앞에서 말씀을 전했다. 그렇게 선출된 후임이 김자연 목사다. 후임만 까다로웠을까? 본인이 원로가 되는 것은 더 철저히 검증하도록 했다.

원로의 5가지 자격을 살피고, 공동의회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본인이 회의를 주재하는 것이 형평에 어긋난다며 수원노회장을 임시 당회장으로 세웠다. 담임목사 시절 급여의 100%를 주겠다는 교회의 제안도 본인이 먼저 거부했다. 그동안 받던 본봉의 70%면 족하다며 교회의 부담을 덜었다. 그런데 원로목사 추대 안건을 다룬 공동의회에서 한 성도가 손을 번쩍 들고 반대했다. 성도들 모두 깜짝 놀랐다. 100% 만장일치 통과를 앞둔 상황이었다. 그 성도는 오히려 “담임목사님 때 받으신 급여를 그대로 보존해 100%를 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했다. 사 실상 만장일치였다. 홍태희 목사에 대한 성도들의 존경심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성도들 고통 나누고자 ‘신협 운동’ 시작

고등학교 재학시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을 체험한 홍태희 목사 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영적인 충만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로 교회를 개척해 복음전파에 나섰다. 그러다가 평택은실교회 담임으로 청빙됐다. 그가 목회를 시작한 60년대 후반에서 70년 대 초반은 성도들의 삶이 무척 가난하고 힘겨웠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지만 그의 눈에 비친 성 도들의 삶은 너무나도 팍팍 해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40%가 넘는 고리대금에 시달리는 성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신협이었다. “대심방을 하는데 성도들 이 돈 300백만 원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하는 거예요. 당시에 6만원 월급 타는 청년이 6부 이자를 뜯기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신협을 만들었어요. 성도 35명이 조합원 돼서 출발했죠. 출자금은 7만원이었습니다.”

목회 초기 홍태희 목사 사모는 굶다가 쓰러졌다. 생활비가 없어 성미로 들어온 쌀 한 되를 팔러 나선 길이었다. 홍 목사는 함평 지역 유지의 아들이었지만 불교집안 장손이 목사가 되자 모든 지원을 끊었다. 후에 아버지는 안수집사로, 어머니는 권사로 천국에 가셨지만, 막상 목회하는 동안은 쌀 한 톨도 지원받지 못했다. 그렇게 모두 어려운 시절이었다. ‘평택은실신협’을 출발하면서 자본금을 만들기 위해 홍 목사는 배추장사도 했다. 시골에서 농산물을 직거래해 주민들에게 팔았다. 그렇게 한푼 두푼 모아 성도들과 꾸려낸 신협은 자산 1500억, 조합원 3천 명에 11층 본점 건물을 가진 튼튼한 우수조합이 됐다.

“살아온 모든 여정이 기적이죠” 지나온 삶을 돌아봤을 때, 홍태희 목사에게 가장 감격적인 순간은 언제일까? 기자의 어리석은 질문에 홍 목사는 “살아온 모든 여 정이 기적”이라고 답했다. 처음 하나님을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고비가 없었다면 거짓말이고, 힘겨운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했다. 첫 손주가 태어났을 때, 조산된 아기는 700그램에 불과했다. 병원에서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했지만 홍 목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순간, 하늘에서 가느다란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그는 가족들에게 선포했다. “장애가 생겨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포기할 수는 없다. 아이를 살리자”고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빛의 기적을 확신했다. 그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 말씀의 증거가 되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2시 반이면 교회에 나갔다. 하루 4시간만 자면서 목회를 한지 50년이다. 성도가 수술이라도 하게 되면 수술을 마칠 때까지 병원을 지켰다. 교단 원로 목사님들의 어려움은 곧 홍 목사의 어려움이었다.

▲ 홍태희 목사는 24억원에 이르는 새성전을 건축하면서도 성도들에게 헌금 한 번 권유한 적이 없다. 교회 건축 후 재정을 아끼고 모아서 성도들 부담 없이 모든 빚을 청산하고 헌당했다.

홀로 남은 한용택 목사님 사모의 발인까지 모두 책임졌다. 그의 마음엔 ‘측은지심’이 가득하다. 그래서 주변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갔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독재정권의 부당함에 항거하며 민주화운동에도 헌신했다. 노태우, 김대중 대통령 때 받은 표창만 40개가 넘는다. 교단 통합도 주도했다. 교단 총무였을 때 은혜측과 연합측이 통합했고, 합동정통 시절, 대신과의 통합을 위해서도 오랜 시간 정성을 기울였다. 교단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법체계를 세운 것도 홍태희 목사의 공로가 크다. 하나님 말씀 다음으로 교회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 홍 목사의 지론이다. 본인이 법을 만들고 체계화 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기에 교회를 떠나는 마지막까지 법과 원칙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인생 4막은 ‘에덴동산선교회’ 풍산 홍씨 가문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입 학 전까지 어린 시절이 1막,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배움의 시기가 2막이라면, 신학교 입학 후 1966년 교회를 개척하고 지금까지 52년의 여정은 인생 3막이다. 이제 3막 인생이 끝나고 4막이 시작됐다. 인생 4막을 이끌 말씀은 야고보서 4장 15절이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주께서 원하신다면 내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남은 생을 바쳐야겠죠. 4막 인생은 85세로 끝을 냈으면 합니다.”

앞으로 85세까지 그가 하고 싶은 일은 선교다. 이름은 ‘에덴동산선교회’로 지었다. 평택 전원주택 단지 안에 예쁘게 지어진 그의 집 옆에 선교사들이 편히 쉴 선교센터를 마련하는 것이 꿈이다. “에덴동산은 4대강의 근원이었습니다. 사람은 물과 흙이 없이 살 수가 없죠. 에덴동산에서 뻗어나간 물줄기가 곳곳으로 흘러 땅을 비옥하게 만들 듯이 에덴동산선교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살맛나는 세상,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잠시도 몸을 쉬지 않는 홍태희 목사는 수석과 분재에 일가견이 있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도 정성껏 가꾸는 그는,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지만 그것을 가꾸는 사명은 사람에게 있다”고 말한다. 사람이나 나무나 어릴 때부터 정성을 들여 키워야 한다는 것. 하나님과 나의 관계, 나와 자연의 관계, 너와 나의 관계가 원만해야 잘 살아온 인생이라면, 그는 잘 살아왔다. “후배들에게 인기 있는 목회자가 아니라 존경받는 목회자가 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남을 나보다 조금만 낫게 여기라는 하나님 말씀처럼 겸손함으로 신앙생활에 본을 보이는 후배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후배들에게 남긴 당부에 그의 평생이 보인다.

자녀와 성도들에게 상처주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겠다는 그의 다 은 자신의 인격을 철저히 다듬기 위한 ‘신앙의 원칙’이었을 것이다. 후배들의 존경 속에 인생 4막을 시작하는 홍태희 목사. 주의 뜻에 따라 새롭게 펼쳐질 그의 4막 인생이 기대된다. 평택=이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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