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성직(聖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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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성직(聖職)
  • 강석찬 목사
  • 승인 2019.03.0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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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찬 목사/예따람공동체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여론조사를 발표해온 한국갤럽이 2년 전에 ‘종교단체와 종교인에 대한 인식’에 대해 결과를 공개했었다.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커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 조사였다. 눈길을 끈 항목이 있었다. ‘우리 주변에 품위, 자격미달 성직자가 많다’는 질문에 ‘그렇다’는 답변이 87%였다. 상당수 국민들은 품위와 자격이 미달인 성직자가 많다고 보고 있었다. ‘수준이하’의 성직자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다. ‘종교단체가 종교 본래의 뜻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비종교인의 회의적 인식이 71%에 이른다.

여론조사의 결과를 본 후, 도저히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다. 사람들이 “뭘 해요?” 물을 때, “난 목사야.”라고 답할 수 있을까? 공공장소에서 신도가 “목사님!” 큰 소리로 부른다면,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난 품위가 있고 자격이 충분한 13%에 속한 성직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생님은 똥을 누지 않는 줄로 알던 때가 있었다. 스승에 대한 존경,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대한 존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스승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겪었던 아픔도 있었다. 선생님은 자신과 다르길 바랐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이 성직자에 대한 일종의 신화(神話)일 것이다. 성직자에 대한 기대가 세상에 파묻혀 사는 자신들과는 ‘다른 삶’, ‘다른 가치관’으로 사는 분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성직자가 자신과 다를 것이 없다면, 아니. 오히려 더 타락한 것처럼 생각되면 그 순간 존경은 사라지고 만다.

왜? ‘품위와 자격이 미달인 성직자가 많다’고 답하는 것일까? 

조계종 총무원장이었던 자승스님이 “도대체 우리는 중(僧)정신이 없다”라 한 기사가 2015년 1월에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다. 종단정치만 하느라 중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고 호통을 쳤다. “참선, 포교, 뭐 하나 목숨 걸고 하겠다는 것 하나도 없다. 왜? 안 심어줬기 때문이고, 안 받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이었지만, 자승스님의 말을 들어보면, 개신교계의 현상을 말하는 것과 똑 같다. 

아주 작은 예를 들어본다. 목사님들은 교경협의회의 임원이 되어 선교의 활동을 넓히기도 한다. 임원이면 신분증을 받는다. 그런데 교통법규위반이나 과속 등으로 교통경찰에게 걸리면, 슬그머니 교경신분증을 내밀어 잘못을 모면하려 하는 목사님들이 종종 있다. 검거한 경찰이 이런 목사님을 어떻게 여길까? 비단 이런 일 뿐일까?
사회 법정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목사님께서, 교단의 중직에 출마를 하면서 하는 말이 교회법이 사회보다 더 우위에 있기 때문이라 괜찮다고 한다. 교단을 위해 일하다가 저지른 잘못이기에 세상법의 유죄가 교회법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런 주장이 도덕적일까? 윤리적으로 부끄러움이 없을까?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닐까?

교회를 혼란 속에 몰아넣어 교인을 편 가르기 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만을 위하는 목사가 되어, 교회 분열의 주역을 뻔뻔하게 행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온갖 시련과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굳건히 지킨다고 자랑스러워하는 목사들을, 과연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목사라 부를 수 있을까?

이런 한심한 행태를 보면서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기독교신문들을 펼치고 싶지가 않다. 괜히 가나안 교인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유가 있다. 제1원인제공자가 바로 목사이다. 사순절을 지키며, 목을 꺾어 십자가 앞에 부끄러움으로 설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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