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를 위해 내가 한 일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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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를 위해 내가 한 일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9.02.2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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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꿈꾸었던 조국,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 ① ‘민족의 스승’, 남강 이승훈 장로

오산학교 설립해 민족 지도자들을 양성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규합에 기여

▲ 남강 이승훈 장로가 설립한 ‘오산학교‘ 제1회 졸업생들

“낙심하지 말고 겨레의 광복을 위하여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해서 쓰게 하라.” 


1930년 5월 9일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는 민족의 스승 남강 이승훈 장로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다. 이 고귀한 유언마저도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뜻대로 유해는 학생들을 위한 생리표본으로 만들어졌지만 그의 뼈는 학생들과 조선 사람들에게 자극을 준다며 강제로 수습하고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오산학교 뒷산에 뿌려졌다. 
 

“십자가 사랑이 민족을 구원한다”

남강 선생은 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고아가 된 남강은 상점의 사환으로 일하다 특유의 성실과 정직함을 인정받아 상인으로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15세 보부상 생활을 시작으로 24살에 유기공장과 상점을 차리고 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며 사업을 키웠다. 

그러다 청일전쟁 여파로 황해도와 평안도가 쑥대밭이 되면서 그의 사업은 붕괴됐다. 주변의 도움으로 단기간에 재기하고 우리나라 운송사업의 시초가 되는 운수회사를 설립할 정도로 그의 사업수완은 좋았다. 

남강은 43세 나이이던 1905년 을사늑약에 체결되자 망국의 한을 느낀 나머지 모든 경영권을 정리해버린다. 이 때부터 남강의 삶은 대전환기를 맞이한 것이다. 공적인 삶을 시작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다. 

낙심한 마음에 어느 날 평양거리를 걷다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들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삼켜 먹으려고 하고 있으니 온 국민이 구습을 벗어버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서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남강은 그 자리에서 삶의 방식을 바꾸어버리기도 결심했다. 14살이나 어린 안창호에서 허리를 숙이면서 단발, 금연, 금주를 다짐했다. 

그리고 사재를 털어 소학교 ‘강명의식’을 세워 신교육을 시작하고,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특히 오산학교는 수많은 민족운동 지도자를 길러낸 산실이었다. 

오산학교 초창기 3년은 기독교 신앙토대가 아니었다. 결국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이뤄지고, 이승훈 장로는 통곡하며 극심한 상실감이 빠졌다. 그 때 평양 산정현교회를 찾아갔다가 한석진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되었고 그 날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다. 

그는 정말 불같은 신앙인이었다. 한 달만에 그는 다시 사재를 털어 오산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그의 신앙적 결심은 평생 이어졌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후진이나 동포를 위하여 한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내가 한 일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3.1운동, 남강이 있어서 가능했다

3.1운동 당시 이승훈 장로는 평양을 중심으로 장로교를 규합해 2월에는 감리교와 함께 기독교의 의지를 하나로 모아 준비했다. 그는 손병희를 위시한 천도교와 불교의 가교 역할을 했다. 독립서명서 서명순서를 두고 종교 간 언쟁이 있을 때 남강이 한 발언은 그가 얼마나 포용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러시오. 이거 죽는 순서요. 죽는 순서를 아무나 먼저 쓰면 어때. 의암(천도교 교주 손병희) 이름을 먼저 쓰시오.”

남강은 세 번째 감옥에 다시 갇혔다. 믿음의 사람은 고난이 왔을 때 더욱 견고해진다고 한다. 남강은 평양 감옥 안에서 고문을 당하고 쉰 중반의 나이에 몸은 쇠약해졌지만 신앙은 더욱 두터워졌다. 구약성경 20번, 신앙성경을 40번이나 읽은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더욱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또 날마다 아침과 저녁 시간을 정해 통성으로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누군가 남강에서 민족주의라고 볼 수 있냐고 질문했을 때 그는 “민족만을 생각하며 살던 적이 있었으나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전체 인류가 한 가족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내가 일본에 대항해 싸운 것은 그들의 불의 때문이지 절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다”며 민족적 배타성을 거부했다. 
 

▲ 남강 이승훈

나라의 후학을 유산으로 남긴 고당

남강의 삶은 제자들에게 표본으로 남았다. 1915년부터 1919년까지 오산학교를 다녔던 고 한경직 목사는 한번은 저녁에 남강이 제자 몇 명을 불러서 나눴던 이야기를 전한 바 있다. 

“선생님이 불러 갔더니 이런 말을 하셨어요. 애국지사를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변해가고 있어. 다만 너희들은 분명히 알아 두거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나 이승훈은 조선 사람으로 살다가 조선 사람으로 죽으련다’ 그 이야기를 하시려고 우리를 청했는데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단 말이에요.”

강변교회 김명혁 원로목사는 “민족과 학교, 하나님을 사랑하며 한 평생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삶이 가장 값진 삶임을 보여준다”며 “그의 조선 교회와 사회에 나타내 보인 강력한 리더십은 고난과 희생과 사랑과 긍정과 관용의 리더십이었다”고 이야기했다. 

남강은 우리 민족의 저력을 확신했다. 한반도의 분단된 현실을 본다면 그는 아마 가만있지 않고 다시 불같이 일어설 것이다. 그의 유언에서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을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가 할 일은 민족의 역량을 기르는 일이지 남과 연결하여 남의 힘을 불러들이는 일이 아니다. 나는 씨앗이 땅속에 들어가 무거운 흙을 들치고 올라올 때 자기 힘으로 들치지 남의 힘으로 올라오는 것을 본 일이 없다. 독립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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