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탄압에 ‘펜’으로 맞선 항일언론…‘공의’ 회복할 때
상태바
일제 탄압에 ‘펜’으로 맞선 항일언론…‘공의’ 회복할 때
  • 김수연 기자
  • 승인 2019.02.18 23: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1절 100주년, 한국교회에 되묻다 (끝)
▲ 일제의 언론탄압에 민족지는 ‘벽돌신문’을 발간했다. 당시 조선 신문들은 일제의 검열에 의해 삭제지시를 받은 기사를 없애지 않고 활자를 뒤집어 인쇄했는데 그 모양이 글자가 아닌 직사각형의 벽돌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사진=국가보훈처]

일제강점기 조선의 ‘신문’은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의 중심기관으로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신념을 목숨 걸고 지켜내려 했다. 일본의 매서운 탄압에 정간·폐간이 비일비재했지만 지식인들은 지하신문까지 만들며 저항언론을 형성해 ‘글 한줄’의 위력을 보여줬다. 특히 한국 언론사(史)의 암흑기였던 1910년대 창간돼 약 22년간 발행된 ‘기독신보’는 교회소식은 물론 식민지하 민족 수난에도 관심을 갖고 제한적으로나마 항일 목소리를 내 큰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언론은 사회부조리에 대한 투쟁보다 보수·진보의 이념대립과 특정 이익집단 대변 등으로 점철돼 진실성과 공정성·신뢰도를 잃은 모양새다. 더욱 뼈아픈 대목은 교회를 감찰하고 성경적 가치관으로 세상을 선도할 기독언론마저 정체성과 영향력을 상실해가는 현실이다. ‘3.1운동 100주년, 한국교회에 되묻다’ 마지막 기획으로는 일제치하에 펜으로 맞섰던, 기독신문을 망라한 구국언론의 사명을 돌아보고 향후 과제를 함께 조명해본다.

일제의 총칼에 대항한 ‘구국신문’
1896년 개화파 인사인 기독교인 서재필이 미국 아펜젤러 선교사의 도움으로 펴낸 ‘독립신문’은 열강의 이권 침탈을 폭로하는 언론의 전통을 세웠다고 평가받는다. 독립신문은 자주독립 및 국민계몽이란 취지에 맞게 한글전용과 저렴한 구독료로 신문의 대중화를 꾀했다. 덕분에 독자들은 혼란스러운 국제정세와 위태로웠던 조선의 안위를 가늠했다. 사회 전반에 개혁방안을 제시한 독립신문은 이후 민간신문들의 모델이 되며 본격적으로 ‘언론계’를 탄생시켰다.

▲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항일매체였던 ‘제국신문’의 모습. 사장 겸 기자였던 이종일 선생은 언론계에서 민중계몽에 앞장서다 몇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실제로 1898년에는 독립신문을 본받아 민간·항일신문들이 잇따라 나왔다. 제국신문은 1902년 경영난으로 폐간될 때까지 서민층을 대상으로 일본의 국권침투와 무능한 정부를 통렬히 비판했다. 사장 겸 기자였던 이종일 선생은 언론계에서 민중계몽에 앞장서다 몇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황성신문은 남궁억 등 개신유학자들이 주축이어서 상류층이 많이 읽었으나 1905년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정간 된지 5년 후 제3470호를 끝으로 종간됐다. 한때 두 신문은 경영이 어려워지자 독자들이 자발적 모금운동을 벌일 만큼 두터운 지지를 얻었다.

1904년 영국인 배설과 독립운동가 양기탁이 설립한 대한매일신보도 유명 독립 운동가들을 필진으로 들이고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대표 항일매체다. 부산대 채백 교수는 저서 ‘신문’에서 “대한매일신보는 대표가 영국인이어서 타 신문들보다 활동이 자유로웠다”며 “조선의 생활상을 기록한 실록이자 외국사상을 소개한 창구, 그리고 민족운동의 구심점으로서 당대 신문은 국민들에게 커다란 용기와 위안을 줬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무렵 이완용의 친일내각이 ‘광무신문지법’을 공포하면서 언론탄압은 거세졌다. 신문의 사전검열이 실시됐고 정간·압수·발매금지 조치가 빈번했다. 이에 ‘벽돌신문’이 등장했다. 신문사들은 삭제지시를 받은 기사를 없애지 않고 활자를 뒤집어 인쇄했는데, 그 모양이 글자가 아닌 직사각형의 벽돌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처럼 국권수호를 위한 민족지가 친일지와 대립한 가운데 결국 일본은 총독부 기관지만 남기고 한국인 발행 신문을 모두 폐간해버렸다.

조선의 언론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가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 1만부를 발간하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이 신문은 3.1운동 당일 창간호에서 독립시위의 전국 확산을 예고했다. 곧바로 주동자들이 일제에 의해 체포됐지만 후계자들이 전국각지에서 비밀리에 신문 발행을 이어갔다. 해외에서도 여러 신문이 간행됐다.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주도로 상해에서 만든 ‘독립신문’이 그 예다.  

‘한국 신문의 역사’ 저자 정진석 교수는 “이 시기 지하신문은 국내 29종을 비롯해 항일운동의 근거지였던 만주 13종·러시아 연해주 5종·중국 7종·미국과 프랑스 5종”이라고 했다. 그는 “국내 언론이 억압당할 때도 해외에서는 항일논조를 유지하며 일본의 만행을 규탄했다”며 “언론의 역사적 성격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개화와 항일의 주요기관으로서 국민계몽과 민족의식 고양에 효과적 기능을 수행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종교 저널리즘’의 제한적 실천
한편 신문지법이 촉발한 국내언론의 침체기에도 불구하고 1915년 발간된 ‘기독신보’는 1937년까지 한국인을 위한 한글신문으로서 그리고 교회언론의 시초 격으로서 소임을 맡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기독신보의 뿌리는 1897년 미국 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와 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가 한국에 복음을 전하고자 각각 설립한 ‘조선그리스도인회보’와 ‘그리스도신문’에 있다. 두 교파가 협력 차원에서 합친 연합신문이 바로 기독신보인 것이다. 


선교사 명의로 발행허가를 받은 기독신보는 김필수 목사를 사장으로 두고, 교회소식 충실보도 및 독자들의 참여를 원칙으로 내세웠다. 목원대 황우선 박사는 ‘한국종교저널리즘의 진화: 기독신보를 중심으로’란 논문에서 “기독신보는 초창기 정치적 성격의 뉴스나 비판·논평은 다루지 않겠다며 순수 종교신문을 지향하겠다고 다짐했다. 기독교 교리에 관한 글과 신앙적 시련을 극복한 사례, 이웃사랑의 미담 등을 원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3.1운동이 일어난 날에도 관련기사를 싣지 않은 기독신보의 행보는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황 박사는 “기독신보는 일제 식민지 정책을 찬동하거나 정당화하는 기사를 게재하진 않았지만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거국적 독립운동에 대해 이렇다할만한 보도를 하지 않고 침묵했다”고 꼬집었다. 그러나 일제가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변경한 1920년부터는 기독신보도 용기를 내 사설·시사뉴스 등을 통해 사회문제의 방안을 제시하고 반일성격의 기사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기독신보는 수차례 압수와 탄압을 겪었고 편집장은 체포돼 징역 2년에 처했다. 이 밖에도 기독신보는 민주적이고 투명한 운영방식과 기고란 활성화를 통한 독자들과의 소통 강화로 긍정적 평을 얻었다. 황 박사는 “기독신보는 갈수록 교회 밖 이슈들도 다루고자 애 쓴바 당대 한국교회와 사회상을 반영하는 사료가 됐다”며 “종교신문을 넘어 일반 저널리즘의 사명을 수행했던 만큼 미래 (기독)언론의 바람직한 방향 모색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시대의 목소리 ‘언론’…공의 담아야
그렇다면 작금의 기독언론 어떨까. 이 물음에 안타깝게도 전문가들은 회의적 시각을 내비쳤다. 한국교회언론연구소 김기태 교수는 “과거 부당한 외압에 굴하지 않고 지사(志士)를 자처하던 언론을 직간접적으로 이끈 지도자 상당수는 크리스천이었다. 반면 지금은 방관자 또는 가짜뉴스의 온상지로서 지탄과 멸시를 면치 못하는 신세”라고 꼬집었다. 기독언론이 단순 선교매체로 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대사회적 현안에 눈을 돌려야 하는 이유다.

기독언론은 굿 뉴스만 전해야 한다는 편견을 버리고 교회에 대한 감시·견제 기능을 강화할 것도 요청된다. 다만 비리나 잘못을 전할 땐 날카로우면서도 사랑에 찬 조언을 건네야 한다. 반대로 귀감이 될 만한 교회나 사역자들도 조명해 진정한 대안언론으로 거듭나야 한다. 연세대 옥성삼 교수는 “교단지로 국한되거나 교계소식을 전달하는데 안주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모든 사안들에 대해 복음에 기초한 건강한 여론을 만들 책임이 있다”고 주문했다.

이를 위해선 기독언론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가 필요하다. 교단장이 바뀔 때마다 언론이 홍역을 앓거나 외부 눈치를 보고 열악한 처우에 고통 받는 사례들이 종종 발견되는데 기독언론이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외연을 넓히려면 구조적 지원이 뒷받침 돼야 한다. 아울러 신대원에도 기독언론에 대한 커리큘럼이 개설되는 등 실력과 영성을 겸비한 인재를 양성해내는 작업도 병행돼야 한다.

무엇보다 기독언론인들 스스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저널리즘 회복을 위한 변화의 몸부림이 절실하다. 옥 교수는 “성경에 따르면 기독언론은 공의와 정의의 목소리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시대를 막론한 ‘기독언론인’의 소명일 것”이라며 “기독 저널리즘을 실현하기 어려운 상황을 내세울 수 있겠지만 100여 년 전 선조들의 ‘구국언론’으로서의 사명을 기억하고 성찰할 때”라고 덧붙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