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위해 ‘하나’됐던 교회는 오늘날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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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위해 ‘하나’됐던 교회는 오늘날 어디에?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9.01.28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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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절 100주년 한국교회에 되묻다 (1)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하는 국민인 것을 선언하노라. 이것으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것으로써 자손 만대에 일러 겨레가 스스로 존재하는 마땅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문 초안>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억압받던 백성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때,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했을 때 북받치는 감정은 또 어떠했을까. 100년 전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과 태화관, 다른 7개 지역에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됐다. 무단통치로 억눌렸던 백성들은 복부에서 끌어올리는 외침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팔이 빠져라 태극기를 흔들었을 것이다. 

일제의 촘촘한 감시망을 생각하면 당시 거국적인 만세시위가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 배경에 교회가 있었다. 세상과 호흡했던 교회, 민족의 문제를 위해 연합했던 100년 전 교회와 지도자들이, 지금 한국교회를 향해 교훈의 메시지를 보내오고 있다. 

▲ 100년 전 기독교는 독립을 위해 이웃종교와 화합하고 교회 안에서 하나됐다. 사진은 덕수궁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의 모습.

“빌린 돈 5천원 갚을 건가요?”
교계 연합단체들이 긴급하게 결성한 ‘3.1운동 100주년 한국교회위원회’는 지난 25일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3.1절 당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대규모 한국교회 기념대회를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100년 전 한국교회가 천도교로부터 빌린 5천원, 현재 가치로 약 2억5천만원을 갚을 의향이 있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최근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주최한 열린대화마당에서 역사학자 이만열 명예교수(숙명여대)가 언급한 내용이 질문의 배경인 듯 했다. 이 명예교수는 “3.1운동을 준비할 당시 분권적 조직 형태 때문에 모금의 어려움을 겪던 기독교가 자금이 풍부했던 천도교로부터 5천원을 빌려 독립운동에 사용했고, 이제라도 갚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같은 질문에 윤보환 준비위원장은 “차용증이 있는지를 묻고 당장 결정할 사안은 아니다”라고 답했고, 한기총 엄기호 대표회장은 “빌린 돈이 있는 줄 몰랐다. 돈이 아니면 말로라도 갚기 위해 종교지도자협의회에서 천도교 교령을 만나 삭감을 논의해보겠다”고 답했다. 

빌린 돈에 대해 금시초문인 교계 지도자들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답변인 동시에 천도교로서는 무례로 여길 수 있는 답변이다. 하지만 100년 전 기독교와 천도교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종교적 차이는 매우 컸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한 뭉친 동반자였다. 3.1 만세운동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본격 전개되고 이승훈 장로가 천도교의 참여를 요청하는 과정에서도 비밀은 지켜졌다. 

이만열 교수에 따르면, 당초 독립선언문 발표 시기가 고종의 장례식 때문에 3월 2일이 추진됐지만, 그날이 주일이었기 때문에 천도교의 양보로 3월 1일이 결정됐다고 한다. 민족대표 33인 중 일부 목회자는 천도교와 함께 운동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어 선언문 발표 현장에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선언문에 서명하고 만세시위를 계속해서 독려했다. 대승적 참여였다. 

순교를 각오했던 믿음의 선각자들
3.1만세운동에서 다른 종교와의 의기투합보다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당시 교회 안에서의 연대와 연합이었다. 

평양에서는 장로교를 중심으로, 서울에서는 감리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준비됐고, 2월 19일 이갑성의 집에서 감리회와 장로교 간 합동회의가 처음 열렸다. 2월 20일에는 기독교와 천도교 대표들이 거사일시와 장소를 협의하기도 했다. 

기독교, 종교와 교단 초월해 3.1 만세운동 전개
교회는 시위운동 거점...기독교인 투옥자의 22%

당시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던 해외 선교사들에게는 비밀로 부쳐졌다. 나중에 3.1운동을 해외에 적극 알리는 역할을 했던 스코필드 선교사에게만 며칠 전에야 통보됐다. 그만큼 철저하게 서로를 믿고 움직였다.

독립선언문이 발표되고 3.1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그 중심에는 기독교인들이 한마음으로 뭉쳤다. 4월말까지 격렬한 시위가 전국적으로 전개됐고 거점은 교회와 기독사학이었다. 1919년 4월 15일에는 경기도 화성에서 만세시위 참가자와 기독교인들이 제암리교회 예배당에 갇혀 학살되는 만행도 자행됐다. 엄청난 핍박에도 교회는 다시 거세게 저항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은 “기독교는 구한말 반봉건 사회개혁운동에 힘썼고, 이후에는 대부흥운동과 국권수호운동에 힘썼다”며 “일제강점기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신민회가 105인 사건으로 탄압을 받고 사립학교법 개정과 포교규칙 등으로 신앙생활의 큰 압박을 받았다”고 기독교인들의 적극적 참여배경을 설명했다. 

고신대 이상규 명예교수는 “일제는 기독교 회유정책에 실패하자 탄압과 분열을 시도하는 제재를 가했고 식민지배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심리적 저항이 일제히 만세운동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자유와 공의 등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저항이었다. 

6월 30일까지 투옥자 9,458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2,087명으로 22%나 됐다. 12월 말까지 복역자 19,525명 중 기독교인은 3,373명이나 됐다. 1919년 교세는 20만명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의 저항운동은 믿음의 고백 아래에서 민족과 나라를 향한 사랑을 구체적 행동으로 옮긴 것이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임희국 교수는 “기독교의 3.1운동 참여는 단순 가담이 아니라 순교를 각오한 신앙적 차원이었다”며 순수성을 강조했다. 

100년이 지났다. 세포분열 하듯 한국교회 교단은 370여개에 달하고 연합기관은 금권선거와 권력다툼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하나되었던 100년전 교회 모습이 회복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지경이다. 만세시위를 이끌었던 기독교 지도자, 거리에서 만세를 불렀던 성도들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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