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할 때마다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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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할 때마다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셨어요”
  • 공종은 기자
  • 승인 2018.04.17 1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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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웨이브 트롯, 나경화 목사

잇단 사업 실패로 탈출구 없는 생활고
‘신포동 블루스’ – 간증으로 찬양사역

목사 나경화. 지금은 ‘신포동 블루스’를 발표하면서 뉴 웨이브 트롯 가수 나유미로 활동하지만, 국악예술고등학교와 중앙대학교에서 가야금을 전공했다. 리틀 주현미, 여자 장사익으로 불리며 국악계와 트롯계를 넘나들었다. 여고생 가수로 아세아레코드와 3년, 대학 때는 KBS 목포가요제에 출전해 대상을 받고 오아시스레코드와 5년 전속 계약을 맺고 활동할 정도의 실력파. 하지만, 밤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부모님의 반대로 30여 년을 무명으로 지내다시피 했다. 그러다 하나님의 강한 부르심에 이끌렸다.

#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 나경화 목사는 숱한 실패와 좌절을 맛보았지만 기도하면서 이겨냈고, 가족이 하나됐다. 그리고 찬양사역으로 새로운 인생과 사역을 시작했다.

가야금을 전공했던 걸 생각하면 잘 연결되지 않지만, 고등학교와 대학에서의 유명 레코드사 전속 계약 이력은 나 목사의 가수로서의 트롯 실력을 가늠하게 한다. 그런데도 삶은 순탄치 않았다. 실패가 뒤따랐다. 부모님과 남편의 사업 실패로 밑바닥까지 추락하기도 몇 번. 안 해 본 일이 없었고 삶이 힘들었지만, 그 아픔을 안고 노숙인들을 위로하는 자리에도 섰다.

“빚더미에 앉아 세상에서 처음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배신의 아픔에 치를 떨었습니다.”

나 목사가 결혼한 때는 1994년. 그 해에 아이를 출산하고 육아와 가수생활을 겸하려고 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남편의 사업이 실패했고 오갈 데 없이 생활이 어려워졌어요. 아이 우유 값이 없어 갓난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없을 정도였죠. 어디 기댈 데도 없었어요. 당시 우리 집안은 우상숭배를 하는 집이었는데, 방황하는 나를 보고도 어느 누구 한 사람 교회로 전도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살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됐다. 닥치는 대로 일했다. 유치원, 피아노학원, 미술학원, 어학원, 무용학원도 운영했다. 하지만 빛은 보이지 않았다. 콤플렉스와 우울증까지 겹친 나머지 나 목사는 선택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선택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이 부름으로 이끌어 간 끈이었다. “죽으려고 마음을 먹고 양주 쪽으로 갔는데, 성산기도원 근처였어요.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그리고 서원했죠. ‘지금까지는 내 욕심대로 살았지만, 이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노래하는 내 달란트를 사용하겠다’고 서원했죠.” 세상을 떠나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이것이 주님께 진 빚을 갚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찬양사역자가 됐다. 그리고 신앙의 힘으로 새 삶을 시작했다.

# 뉴 웨이브 트롯으로 새로운 사역

찬양사역은 십자가선교회에서 시작했다. “찬양사역을 하겠다고 서원하고 나니 신기하게도 십자가선교회라는 곳에서 연락이 왔어요. 순종하고 앞뒤 가리지 않고 찾아가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나 목사를 환영한 곳은 서울역에서 예배를 드리는 노숙 예배 처소. 당시 나 목사의 생활과 상황도 이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거기서 노숙자들을 상대로 첫 찬양사역을 했다. 매월 첫째 주 목요일에 서울역 노숙자들을 방문하는 찬양사역은 5~6년 정도 이어졌다. 힘들게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웃음을 잃지 않았다. 똑같은 처지였지만 그들을 격려했고, 어떻게든 이 사역을 이어나가려고 애를 썼다.

나 목사가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환경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누는 삶에서 행복과 감사를 알았기 때문이다. 양로원과 노숙자, 미혼모와 그 자녀들을 섬기는 일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런 행복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남편의 또 다른 사업 실패로 다시 좌절해야 했다. 그래도 나 목사는 감사했다.

“남편이 변화되고 제 삶도 축복의 삶으로 변화됐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눈과, 모든 것,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된 거죠.”

그러던 중 뜻밖의 제안이 왔다. “트롯 곡을 주겠다”는 인천 유명 교회 목회자의 제안이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또 다른 부르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세상으로 나가서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부름이죠. 제가 하나님을 찾으니까, 하나님 앞에서 중심을 잡으니까 ‘신포동 블루스’라는 곡을 부르게 하셨습니다.”

과거 나 목사에게는 ‘주현미의 뒤를 잇는 샛별’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녔다. 그리고 ‘여자 장사익’이라는 닉네임이 있었다. 이런 실력자에게 주어진 ‘신포동 블루스’, ‘자기 어디서 뭐해’ 등 일곱 곡의 곡들은 ‘뉴 웨이브 트롯’이라는 새로운 사역의 길로 나 목사를 이끌었다.

“내 노래에 날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노래에 희망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18년의 선물을 함께 나누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귀로만 듣는 노래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하나되는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이번에 발매된 신포동 블루스의 판매 수익금 중 일부는 생명을 나누는 사람들의 각막 이식 수술비로 후원된다. 그리고 일곱 곡 모두가 전도하는 노래로 활용될 수 있도록 노래에 전도 코드를 숨겼다.

▲ 나 목사가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환경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누는 삶에서 행복과 감사를 알았기 때문이다. 양로원과 노숙자, 미혼모와 그 자녀들을 섬기는 일을 내려놓지 않았다.

# 가정교회 개척과 목사 안수

나 목사는 안수를 받기 전에도 간증을 많이 다녔다. 국내는 물론 외국 한인 교회에서의 초청도 이어졌다. “하지만 말씀의 깊이가 없고 깨달음이 없으니까 어느 날부턴가 간증하는 것이 무서워졌어요. 이후에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철저히 무장한 신실한 사역자를 원하셨어요.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면서 기적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벗어날 수 없었던 불가능한 현실에서 나경화를 일으킨 것은 신학 공부였다. 카드로 등록금을 내고 동전을 모아 교통비를 충당하면서 신학을 공부했고, 마침내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게 올해 1월. 목사 안수를 받기까지 가장 큰 힘이 됐던 것은 최고의 동역자인 남편과 가족이었다.

나 목사는 지난 해 11월, 교회를 개척했다. ‘세계아가페교회’.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개척한 가정교회다.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이기도 하지만, ‘공동체’를 향한 마음 때문이었다. 아직 교인들은 없다. 주위에 살고 있는 큰이모와 작은이모 등 친인척들이 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예배가 끝나면 본인들이 출석하는 교회로 간다.
“목사 안수를 받기 전부터 가정예배에 대한 꿈이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을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가정, 사랑하는 남편과 자녀들과 함께 지내는 내 가정을 먼저 천국으로 만들고 싶었죠.”

그렇다고 가정예배를 꼬박꼬박 드리는 게 쉽지는 않았다. 자녀들이 모이면 약사인 남편이 빠지고, 남편이 집에 있으면 아이들이 바빴다. 모두가 바빠 시간을 맞추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예배를 위한 마음을 모았고, 당시 대만에 유학 중이던 딸은 ‘우리 가정이 모여서 예배 드리기를 원한다’는 기도를 계속했다.

아내가 목사 안수를 받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지만 남편이 가장 좋아했단다. ‘말씀을 전하는 어머니가 됐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계속해왔던 딸도 기도가 현실이 된 것을 보고 누구보다 좋아했다. “가정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리게 되니 서로의 기도 제목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하며 마음을 모아 기도하게 됩니다. 이 시간이 정말 좋았습니다.”

나 목사는 자신의 인생, 그리고 목회 스토리의 99.9%는 노래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 우리의 삶, 감사와 회개 등 모든 것이 노래에 담겨 있고, 이 노래를 하는 것이 제 목회입니다. 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것으로 주셨습니다. 노래를 통해 마음이 상한 사람들,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 좌절한 사람들을 보듬고 치료하는 것이 제 목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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