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만 계시고, 땅에는 안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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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만 계시고, 땅에는 안 계신다?
  • 서진한 목사
  • 승인 2017.11.3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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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한 목사·대한기독교서회

“그때가 이르면, 내가 등불을 켜들고 예루살렘을 뒤지겠다. 마음 속으로 ‘주께서는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술찌꺼기 같은 인간들을 찾아서 벌하겠다.” 예언자 스바냐가 전하는 신탁의 말씀이다.(습 1:12)

하나님께서 도성을 발칵 뒤집어 사람을 찾으실 거라고 한다. 찾는데 그냥 찾는 게 아니라, 등불을 켜들고 찾으신단다. 밤중이 아니니, 등불을 켜들고 찾으신다는 것은 흔한 말로 ‘눈에 불을 켜고’ 샅샅이 뒤진다는 뜻이다. 분노에 차서, ‘술찌꺼기 같은 놈들’을 다 찾아서 벌을 주겠다고 하신다! 한마디로 공포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굴 찾으시는가? 바로 ‘하나님은 복을 주지도 벌을 내리지도 않는다’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신앙의 지도자나 관리로, 겉으로는 하나님의 법도를 입에 달고 살지만, 마음 속으로는 전혀 딴 생각을 한다.

복도 벌도 내리지 않는 신은 인간사에 무심하거나 무능한 신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곳에만 계시니 이 세상사에는 아니 계신다. 하나님이 하늘에 유폐된 것이다. 인간들이 부대끼며 사는 이 땅에는 간여하지 않으시니, 인간의 일상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되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곳, 그곳은 인간의 탐욕과 그것을 이룰 권력과 세력, 돈이 지배한다. 신의 법이나, 인간의 윤리는 다만 겉치레 수사일 뿐이다. 그들은 신이 없다고 내대고 말하는 이들보다 훨씬 더 무서운, 실질적인 무신론자들이다. 이른바 윤리적 무신론자들이다.

요즘 한국교회를 지켜보는 심정이 어찌 스바냐 같지 않을까? 정말이지 올해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아니어야 했다. 종교개혁 어쩌고 하는 바람에 더욱 민망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별 감동을 주지 못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토론들, 숱한 성명서, 대형집회 등은 완전히 빛이 바래버렸다.

어쩐 일인지 알 수 없지만, 교계 언론은 소수를 제외하면 조용하기만 한데, 교계 바깥의 일간지, TV와 라디오 방송들이 비판하기 시작했다. 교단 안에서는 신학생들과 교수들의 촛불 기도회가 이어지고, 노회 일각이 반발하여 소송을 제기하고, 동문 목회자들이 기수별로 반대 입장을 발표하고 나섰다.

중소 교회들은 이 여파로 전도가 외면 당하고, 교인 떨어지는 소리가 마구 들린다고 아우성이다.

세습이든 승계든 다 좋다. 소속 교단이 법으로 허용하고 있다면, 밖에서 뭐라던 어쩌겠는가? 세습금지 조항이 문제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니, 교단헌법이 수정된 뒤에 했다면 뭐라 하겠는가? 아니면 차라리 애초부터 ‘나는 자식에게 승계할 생각이다’고 주장했더라면 좋을 뻔하였다. 남들 보기에 일관성이라도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딱 한 가지는 정말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렇게 큰 교회는 십자가처럼 너무나 고통스러운 짐이라,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지울 수 없으니, 내 아들에게 이 십자가를 지운다는 취지의 그 발언 말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그렇게 해서, 세상의 놀림거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어디 그 교회만 탓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의 일상에 관여하시며, 벌과 복을 내리신다고 믿는다면, 신앙인에게는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있고, 끝내 넘지 말아야 할 선, 소위 레드라인이 있게 마련이다. 한국교회에는 언제부턴가 그게 없어진 듯하다. 교계 여기저기서, 물론 나의 부끄러움까지 포함하여, 법과 원칙을 무시하고, 도덕, 윤리는 말할 것도 없이,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는 일들이 자주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께서 오시는 날’ 이른바 ‘야훼의 날’을 자신들의 해방과 구원의 날로 여겼다. 그런데 그날은 오히려 심판의 날이었다. 우리는 스바냐의 신탁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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