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김 전도사’의 소박하지만 남다른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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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김 전도사’의 소박하지만 남다른 목회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7.06.01 1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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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하나님을 만나게 한다…기독 만화가 김민석 전도사

총신대학교(합동) 신대원 3학년인 김민석 전도사는 구리 돌다리교회 중등부 전도사로 일하면서 기독교 만화를 그리고 있다. 그는 벌써 두 권의 만화책을 낸 ‘작가’다. 처음 낸 ‘미루나무 그림묵상’은 4쇄까지 찍은, 그 출판사에선 잘나가는 책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올해 ‘미루나무 그림묵상 2’를 냈다. 

이 책은 한 컷에서 네 컷까지 짧은 내용의 그림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가 일상 속에서 더 나은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며 겪은 애환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건 그 자신이 스스로에게 전하는 ‘설교’이기도 하다.

지난 2년 여 동안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등에 올린 그림들을 엮어 낸 것인데, 짧은 기간 동안 그는 1만2000여명의 팔로워(Follower)를 거느릴 만큼 인기 많은 스타 작가가 됐다. 그러나 김 전도사에겐 끝까지 지키고 싶은 ‘목회’ 원칙이 있다. 

▲ 지난 겨울에 ‘소망’이 아빠가 된 김민석 전도사는 1만2000여명의 팔로워(Follower)를 두고 ‘미루나무 그림묵상’을 두 권이나 낸 인기 만화작가지만 수익금을 선교헌금으로 보내며 섬기는 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즐거움으로 산다.

만화 수익금은 선교헌금
“미루나무 그림묵상으로 얻은 수입이 아직 많지는 않지만 제 호주머니로 들어오게 하지 않았어요. 1권에 대한 원고료를 처음 받았을 때에 어디다 써야할지 고민했어요. 사실 제 책을 제 돈으로 사서 지인들에게 나눠준 비용이 더 컸습니다. 마이너스였죠. 그래도 그 원고료를 제 형편이 나아지는데 쓰고 싶지 않아서 다른 곳에 선교헌금으로 보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지난 추운 겨울에 김 전도사는 ‘소망’이 아빠가 됐다. 한 아내와 아들의 가장이 된 신학생, 파트타임 교회 전도사로 받는 사례금으로는 넉넉지 못할 형편이다. 만화를 통해서 척박한 기독교 문화를 일궈간다는 나이스한 구호의 뒤안길에서 가난한 전도사의 생계에도 도움이 되리라는, 기자의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그는 이렇게 뒷말을 이었다.

“다른 전도사님들도 이런 부수입이 없이도 잘 살고 있잖아요. 저도 부수입이 없어도 잘 살 것이기 때문에 부수입으로 들어온 건 다 하나님께 쓰려고요. 앞으로 원고료가 더 들어오면 정기후원을 해주고 싶어요.”

이런 나눔의 태도는 김 전도사에게 낯설지 않다. 그가 신대원을 처음 들어갔을 때다. 먼저 두 달 동안 헬라어와 히브리어 동계 어학강좌를 들어야 했다. 난생 처음 접하는 암호 같이 생긴 히브리어는 단어 외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림을 이용해서 히브리어 단어를 외우니까 빨리 외워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날그날 외워야할 히브리어 단어를 만화로 그려서 동기들에게 나눠줬는데 다들 좋아했어요. 매일 그걸 그려서 반별 카톡방에 올렸는데 다른 방으로 퍼져나갔어요, 나중엔 학교 밴드에 올려달라고 해서 어학강좌 500명 중에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어요.”

많은 학생들이 그 만화를 보면서 히브리어 단어를 외우고 다음날 시험을 치게 되자, 그의 어깨도 나날이 무거워졌다. 점점 그림의 퀄리티가 높아지게 되어, 하루 종일 작업해서 밤 9시에 올리는 일상이 됐다. 어떤 학생은 이름만 알던 그에게 음료수 들고 찾아와 ‘전도사님 덕분에 히브리어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네 컷에 담긴 설교 한 편
“사실은 그 일로 ‘미루나무 그림묵상’ 책을 내게 된 겁니다. 그때 같이 공부하던 분 중에 문종성 전도사님이라고 7년간 자전거로 세계여행 하며 책도 많이 내고 방송활동도 하던 분이 있었는데 어느 날 저를 찾아오셨어요. 평소 그린 그림 좀 보고 싶다고요. 그래서 보여줬더니 책을 내자고 하더군요.”

거기 한 컷에서 네 컷까지, 압축된 그림 속에 그가 체득한 은혜를 담았다. 그 은혜는 크게 두 가지 감성으로 나타난다. 힘든 세상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고달픈 신앙인들의 삶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너만 힘든 게 아니라 모두 힘들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신앙인으로 산다는 게 힘든 데, 이게 자기만 그런 게 아니라 원래 힘든 거라고 위로해주고 싶었어요. 또 하나는 그러면서도 참된 신앙에 대한 경각심을 주고 싶었죠. 정곡을 후벼 파는 그림이요. 이 둘의 균형을 잡으려고 했어요.”

이건 사실 다 김 전도사 자신의 이야기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그는 꿈이 당연히 화가였다. 유치원 때부터 그림을 어렵지 않게 쓱쓱 그렸고, 한참 고민하던 친구들은 그의 그림을 흉내 내곤 했다.

중학생이 되어 부모님을 따라 한얼산기도원을 자주 다니며 그 꿈은 목회자로 변했다. 새해가 되면 일주일씩 그 추운 겨울에 기도원을 다녀왔다. 여름방학이면 당시 에어컨도 없던 기도원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다보면 이게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에 미끄러지기도 했다. 

“형이 갑자기 신학을 하겠다고 하면서 제 진로가 어긋나기 시작했어요. 둘째는 목사가 될 것으로 짐작하셨지만 큰 아들이 갑자기 목회자가 되겠다고 하니, 아버지가 당황하셨죠. 결국 제가 미대 실내디자인학과를 가게 됐습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소명은 아직 남아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디자이너냐, 목회자냐, 양 갈래 길에서 갈등이 점화됐다. 뭔가 분명한 하나님의 ‘콜링’이 있기를 바랐는데, 그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2년 동안 직장도 아니고, 신대원 준비도 아닌, 방황의 ‘백수생활’을 보냈다. 너무 괴로운 시절이었다.

“그때 집 앞 교회로 새벽기도를 나갔다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났습니다. 그전까지는 제가 교만했었죠. 어린 시절부터 회장이란 회장은 다 맡으며 교회에서 인정받으며 자라서 저는 제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연히 제가 목사를 하면 잘할 것으로요. 그러나 그 고통의 시절을 겪으며 정말 한없이 낮아지며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신앙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더라고요.”

아예 그 맛을 보기 싫어
김 전도사는 “계획이 없는 게 계획”이라고 한다. 그는 “만화 그리는 주님의 종”을 자처한다. 종에겐 계획이 없다. 종이 계획이 있다면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갑자기 어떤 명령을 내리고 부르실 때에 순종하기 어려우니까. 떠나라시면 떠나야 한다. 그에겐 상상만 해도 괴로운 일이지만, 그림마저도 내려놓으라 하시면 놓아야 한다. 

“큰 교회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큰 교회에서 사역하려는 마음은 없어요. 아무래도 큰 교회에 가면 페이도, 여건도 좋죠. 뭐든 하려고 하면 빵빵하게 지원해주죠. 그러나 제가 큰 교회를 가게 되면 그 보다 작은 페이를 주는 교회로 가기 힘들어질 겁니다. 대개 점점 큰 교회로 옮기지, 큰 교회 갔다가 작은 교회로 가지는 안더라고요. 그래서 큰 교회에 원서를 쓰지 않아요.”

그는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 줄 안다고 한다. 많은 사례금을 받다가 적은 사례금을 주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을 상황이 올 때에 불평하는 자기 자신을 보기 싫다. 그래서 아예 그 맛을 보기 싫은 거다. 

그러나 그는 아마 세상에서 그 어떤 큰 교회 사역자가 부럽지 않을 ‘김 전도사’다. 돌다리교회 중등부 학생들은 그의 그림이 곁들어진 설교에 환호한다. 30여명의 꿈나무들이 그의 말씀 앞에서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보는 것처럼 더 행복한 일이 있을까.

김 전도사는 발길이 닿는 어느 곳이든지, 거기가 화실이다. ‘가난한’ 만화가인 그에겐 아직 휴대용 컴퓨터 태블릿이 없다. 그래서 오히려 더 자유로운 점도 많다. 아날로그적 감성이 분출한다. 필기도구와 종이만 있다면 어디에서라도 하나님을 묵상한다, 그분이 그림 속에 임재한다. 그 기쁨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는 정말 행복한 ‘김 전도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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