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통해 탈북자 참상 알리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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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통해 탈북자 참상 알리고파"
  • 승인 2003.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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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나라는 모두들 부유하게 사는 것을 보고 놀랐습네다.” 탈북 과정에서 L선교사를 만나 주님을 영접하고 지난해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지해남집사(인천보배교회, 54세). 아직도 서툰 한국말 때문에 대화 도중 몇 번이고 되묻기도 했지만 그녀가 전해주는 탈북자의 생활과 북한에서 겪었던 인간이하의 삶은 한마디로 처참했다.

탈북 과정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영접하게 된 그녀는 이젠 주님만 찬양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한국에 정착하면서 북한의 참혹한 실상을 노래로 알리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쫓아다닌다.

최근 부산과 순천, 인천에서 간증집회를 인도하고 왔다고 말하는 그녀는 이제야 비로소 삶의 보람과 안정을 찾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겪었던 과거는 보통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한 편의 영화처럼 불행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불행의 끝을 그녀의 삶을 통해 시험하는 것처럼.

북한 함흥에서 김정일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선전대원 출신인 지해남집사. 20여 년간 선전대원으로 활동한 그녀는 93년 집안에서 지인들과 ‘남한노래’인 ‘홍도야 울지마라’를 불렀다는 이유로 3년 여간 참혹한 옥살이를 했다. 22시간 동안 계속되는 고된 노동과 ‘개별담화’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성추행을 견뎌야만 했다.

“예심을 받기 시작할 무렵이었죠. 한 끼로 80g의 식사와 절인 배춧국이 전부였습니다. 그로인해 영양실조가 걸린 사람에게는 콩나물과 날된장 한줌을 줍니다. 그것도 모자라 어느 날 20대 초반의 경비원이 나오라고 해서 나갔습니다.

남자들만 다니는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는 소리를 지르면 죽인다고 협박하고 강제로 성폭행을 했습니다. 이 일을 겪은 후 감방의 머리카락과 굴러다니는 밥 덩어리들을 섞어서 먹는 등 자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꼬리 없는 짐승과 같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3년 동안 감방 안에서 인간이하의 생활을 하며 여름에는 구더기가 우글거리고 겨울에는 온몸을 마비시킬 정도로 매서운 찬바람을 견뎌야만 했다. 죽지 못해 형량을 마치고 풀려났지만 그녀의 아들과 남편은 이미 굶어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너무도 암담했다. 이미 삶의 희망을 상실한 그녀에게 너무도 가혹한 형벌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교화소 출신이라는 이유로 이웃들도 그녀를 멀리했다. 단지 노래 한번 잘못 부른 것으로 죄 아닌 죄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통치고는 너무나 큰 형벌이었다.

결국 북한에서 살아갈 이유를 상실한 지해남집사는 ‘자유와 민주’를 찾아 98년 중국으로 탈북했다. 혹독한 날씨에 두만강을 건너 어렵게 탈북을 성공했지만 불행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갈 곳 없이 떠돌던 그녀는 결국 인신매매단에 납치되어 8천위안의 몸값으로 중국 남자에게 팔려 원치 않는 중국인의 부인으로 살아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다시 잡혀 북한에 보내지면 죽는다는 생각’ 뿐이었다.

“저와 결혼한 중국남자는 제가 도망갈까 봐 밖에서 문을 잠그고 출근한 뒤 퇴근해서야 문을 열어 주는 감금생활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폭행과 성고문을 당하는 생활로 몇 개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그 집에서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에 그 남자의 공장에서 일을 하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여러번 중국 공안이 공장을 수색했지만 그때마다 옷장이나 여자화장실에 숨어 위기를 벗어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도망칠 기회만 엿보았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 될수록 기자의 상상을 초월했다. ‘산전수전’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차츰 남편의 감시가 느슨해질 무렵 그녀는 탈출에 성공했다. 탈출의 기쁨도 잠시, 중국에서 그녀를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꿈과 희망을 이뤄준다는 한국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2000년 10월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탈북자 6명과 중국 산둥성 해안도시에서 훔친 어선을 이용해 탈출을 시도했지만 높은 파도에 휩쓸리면서 실패했다. 그러나 그녀와 5명의 탈북자들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한 달 후 다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지난번보다 큰 배를 훔쳐 새벽 2시에 탈출을 시도했다. 일기예보를 듣고 완벽하게 준비한 탓에 희망도 컸다. 그러나 또다시 배가 고장을 일으켰다. 검푸른 바다밖에 보이는 것이 없는 망망대해에서 3일간의 표류생활을 해야만 했다. 두 번이나 고장 난 배를 훔치다니 시쳇말로 재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좋기만 하던 일기가 변하여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고장 난 배를 덮쳐왔다.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하던 차에 중국의 대형선박 2척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 배가 처음 한국배인줄로 착각하고 배위에서 만세를 부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 배에는 한국 깃발을 걸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우리 배를 한국배로 착각하고 구출해 주었습니다. 우리들도 그들에게 한국화폐 만원권을 건네고 호위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배가 한국배가 아닌 중국배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난 후 일행을 중국 공안에 넘겼습니다. 두 달 동안 감금을 당했죠.”

중국 공안은 그를 북한 신의주로 보냈고 그녀는 다시 1년 반에 걸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의 고문으로 오른쪽 다리 아킬레스건을 크게 다쳤다. 그렇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형량을 마치고 난 후 다시 중국으로 탈출했다. 북한에서 살기에는 이미 그녀가 받은 상처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한국인 선교사를 만나고 비로소 하나님을 영접한 그녀는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등을 거쳐 지난해 1월 한국에 정착했다. 그러나 고문으로 다친 다리 때문에 일하던 식당에서 쫓겨나는 등 고난은 계속됐다.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펴내기 위해 부산에 내려갔다가 탈북자들이 중심이 된 시민단체 ‘북한인권시민연합’을 만난 것은 그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그리고 지난해 10월부터 본격적인 북한주민 인권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체코에서 있었던 ‘제4회 북한인권 난민문제 국제회의’에 참가해 중국 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등 북한의 실상을 온몸으로 알리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무엇인가가 짓눌렀다. 자신을 도와줬던 하나님의 음성이 자꾸만 들리는 듯 했다. 마치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했다는 생각이 엄습해 와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교회를 찾아가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나의 삶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난 후 성가대원으로 봉사하고 싶어 서울의 대형교회를 찾아갔다. 그러나 교회측은 나이가 너무 먹었다는 이유로 그녀를 거절했다. 또 다시 그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주님을 배반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의지할 수 외톨이 인생이었기에 다시 주님을 붙잡았다.

요즘 그녀는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어느 교회건 기도원이든 가리지 않고 찾아가 찬송과 함께 복음운동을 펼치겠다”고 말한다.

그녀는 만남을 정리하면서 자기가 지었다는 ‘통일기도’라는 곡을 들려주었다. 내용은 이렇게 시작됐다.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겨레의 앞날에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열어 주시고. 나라를 세워 주셨던 하나님.

지나간 오랜 세월. 수많은 역사의 험난한 시련을 통해 이 민족을 시험하시고 단련하시고 인도하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실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다시는 지난날과 같은 고통과 굴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분열된 민족이 화합하고 단결하여 남과 북이 평화롭게 통일되어 민주와 자유 정의와 복지를 누릴 수 있게 인도하소서.”

하나님의 품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지해남집사가 남쪽의 따뜻한 바람을 느끼길 기대해 본다. 그리고 더 이상 지집사와 같은 탈북자들의 고통이 하루속히 해결되기를 소망한다.

송영락기자(ysong@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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