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전여전 20년 ... 대를 이어 ‘이방인’을 섬겨
상태바
모전여전 20년 ... 대를 이어 ‘이방인’을 섬겨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7.03.29 17: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주노동자들의 참된 친구…남양주이주노동자센터 정숙자 소장·김경의 총무
▲ 남양주이주노동자센터의 소장인 정숙자 목사와 총무인 김경의 목사는 모녀지간이지만 때로는 동지요, 동역자로서 함께 사역하고 있다. 설립 20주년을 맞아 그 동안 도와준 많은 후원자와 협력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한국에 온 이주 노동자들을 20년째 대를 이어 섬기고 있는 목회자 ‘모녀’가 있다. 남양주이주노동자센터 소장인 정숙자 목사, 그리고 이 센터의 총무를 맡고 있는 김경의 목사다. 김 목사는 이 센터와 함께 사역하는 이주여성교회 담임목사이기도 하다. 

1997년 3월 16일, 경기도 마석 성생이란 지역에 밀집된 가구공단에는 약 2,000명의 이주노동자가 살았다. 협소한 공간에서 공장 쓰레기더미와 더불어 살았던 이들에겐 늘 손가락이 잘리는 산업재해나 임금체불, 인권유린이 끊이지 않았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개념이나 배려가 전무했던 시절이니, 이들이 당했던 고통은 그 종류나 깊이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인근에 살던 ‘이옥동’ 씨는 평범한 가정주부였지만 일터를 찾아 헤매는 이주노동자들을 길에서 만나면 자신의 집에 데려가 식사 대접을 하면서 그들을 도왔다. 여성교회를 담임하던 정숙자 목사는 그 소식을 듣고 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하자며 이곳에 센터를 설립했다. 여기엔 정 목사의 개인적인 아픔도 작용했다.

아픔 속에 사명이 있다
그는 일본강점기인 1936년에 일본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일본으로 이주해 살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해방이 되어 귀국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못했다. 만 12살의 어린 나이 때부터 민족차별을 겪어야 했다. 6학년 때의 담임선생이 군 출신이었는데, 해방 후 한국에서 귀국하며 조선 사람에게 당했던 것을 어린 학생 정숙자에게 앙갚음을 했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외국인’이란 차별을 받았던 재일 한국인들처럼 그도 ‘조센징’이라는 굴레 속에서 대학입시에도, 취직에도 장애가 잇따랐다. 그러나 강인한 여성이었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모태신앙으로 꿋꿋이 견디며 재일대한기독교총회 산하 전도사가 됐다. 

늘 한국어에 목말랐던 그는 1962년 4월, 시모노세키에서 부산행 연락선을 타고 한국 땅을 밟는다. 한국 남자와 결혼을 했고 한국사회에 뿌리내렸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는 또 다른 ‘이방인’이었다. 지금과는 더욱 다른 시대여서 생활 속에서 일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압박 속에 살았다. 한국말에 서툴렀던 그는 ‘반쪽인간’일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이주노동자들에게서 다시 보았다. 한국에 온 지 35년 만이었다. 이들이 이 땅에 당하는 고통의 눈물 속에서 ‘고향’이 보였다. 그가 일본에서, 또 한국에서 겪었던 ‘차별’이 새로운 ‘사명’으로 승화되는 시점이었다. 그들을 품고 살아온 지 벌써 20년. 그의 딸 김경의 목사도 2002년부터 함께 했다.

“호주의 한 대학원에서 작곡공부를 하다가 아버지 병환 때문에 귀국했는데, 당시 어머니께서 일본 선교사 일로 바쁘셔서 이 일을 돕게 됐죠. 그때는 야학을 하고 있었는데 환경오염으로 찌든 공장 창고의 열악한 형편에서 매일 밤 야학을 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그걸 어머니에게만 맡겨 둘 수 없었죠. 그래서 결국 6년간 해온 공부를 중단하고 2003년 영구 귀국을 했어요.”


함께 만들어온 20년 섬김
김 목사 역시 ‘이방인’의 경험이 있다. 뉴질랜드 빅토리아 음대를 졸업하고 호주 시드니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다. 가난한 유학시절이라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벌었는데 임금을 제때에 받지 못했던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에 와서 일하면서 말이 서툴러 임금체불, 폭행, 산업재해 상해를 입고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현재 이주노동자센터에는 450명 가량의 이주노동자들이 가입해 있다. 산재상담, 체불임금 및 퇴직금 상담, 직장폭력, 가정폭력 상담, 건강상담을 통해 한국말과 법에 서투른 이들을 대신해서 업주와 관공서에 정당한 권리를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뿐 아니라 함께 사역하는 이주여성교회를 통해서 신앙적인 치유와 회복을 얻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붙드는 데까지 나갈 수 있도록 각종 신앙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센터와 교회가 20년 동안 올곧게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건 수많은 협력자와 봉사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센터에서 발간한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세요’라는 안내책자의 연혁을 보면 초창기 어렵던 시절에 ‘박찬숙 사장’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당시 마석가구공단에서 일하던 이주노동자들은 고달픈 노동 후에 술과 노름으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여기 싸움과 분쟁이 꼬리를 물었고 인간관계는 황폐해져갔다. 저녁시간을 선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그러나 현장인 마석가구공단에선 외부인이 들어오는 걸 마뜩찮게 여겼다. 이때 이곳의 젊은 여성 사업가 박찬숙 사장은 공장 안에 장소와 집기를 제공해주면서 적극 후원했다. 

이밖에도 많은 후원자들이 센터와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지원했다. 지난해 5월에는 화도읍 가구단지에 있던 사무실에서 나와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경제적으로 늘 ‘마이너스’인 센터 형편상 옮길 곳이 없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스물 세평 작은 공간이지만 금곡동 158-28의 새 건물 2층으로 이전할 수 있었다.

지난 3월 26일 주일 오후 드린 20주년 기념예배에서 한 참석자는 “센터도 이젠 좀 좋은 건물에서 있어야죠”라고 했을 때, 모두들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김경의 목사는 “지금은 비까번쩍하지만 그 당시는 삭막한 곳에서 시멘트 바닥에 장판 깔고 가건물에서 일했다”고 돌아봤다.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센터는 이주노동자들에게 꼭 필요한 고정적인 사역과 함께 그때마다 그 지역이 요구하는 특별한 사역들을 하곤 했다. 야학이 그랬고, 탁아방, 방과후교실, 그리고 미혼모와 아기를 위한 쉼터가 그랬다. 센터가 이번에 옮긴 금곡동 지역은 다문화가정이 많은 곳. 김 목사는 이들을 대상으로 ‘통합예술치료교실’을 꿈꾸고 있다.

“일종의 음악치료교실인데, 음악만 하는 게 아니고, 미술, 독서, 사진, 영화 등 다양한 문화와도 접목해서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싶어요.”

김 목사는 외국에서 음악을 전공했다. 그때는 이런 일을 위해 공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늘 오묘하다. 김 목사는 원래 이화여대 건강교육학과에서 보건교육을 전공하고 서울여대 사회사업학과를 다녀 사회복지사1급 자격증이 있다. 이것 역시 지금 사역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지나고 보니 “이때를 위함”이었다.

“처음에 여기 와서 일할 때 보건교육을 전공한 게 큰 도움이 됐어요.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열악해서 이런 저런 병도 많았고, 피임 등 보건교육도 많이 필요했거든요. 음악이 좋아 공부했는데 또 이렇게 좋은 일에 쓸 수 있어서 감사하죠.”

아직 미혼인 김 목사는 약해보이지만 강단이 있다. 이것도 어머니 정 목사와 ‘모전여전’인데, 그 옛날 일본에서 생존의 투지와 신앙을 보여준 할머니가 이제 궁금해진다. 이주노동자 섬기기 20년, 이 교회에 들어서면 너나 할 것 없이 묵상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잠시 머물다 돌아가는 ‘이방인’임을. (교회:031-595-0310)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