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폐지’가 작품이 되고 사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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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폐지’가 작품이 되고 사랑이 된다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7.01.25 1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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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이 주은 폐지 비싸게 사는 사람들…사회적기업 ‘러블리페이퍼’ 기우진 대표

칼바람이 얼굴을 때리는데, 잔설과 빙판이 뒤섞인 비탈길을 한 노인이 내려간다. 자기 몸만한 손수레에 끌려간다. 잔뜩 쌓인 폐지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인다. 그 길은 차들이 쌩쌩 달리는 아스팔트로 이어진다. 할머니의 길이 위태위태하다.

그래도 이 할머니는 행복하다. 이 추운 날씨에 폐지를 꽤 모았다. 딴전이라도 피운 날에는 어림없다. 폐지가 있어야할 곳이 텅텅 비어있다. 폐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상점 주인의 눈칫밥을 먹기도 한다. 악전고투가 따로 없다. 이렇게 하루 종일 모은 폐지 50kg을 고물상에 주고받는 돈은 고작 5000원. 

이것도 재수 좋은 날이 그렇다는 이야기. 하루 8시간 근무로 치고 계산하면 시간 당 600원 남짓하다. 최저임금의 10분의 1도 안 된다. 사회적 기업 러블리페이퍼(070-7804-0581)는 이렇게 노인들이 힘들게 주운 폐지를 비싸게 사들이는 일을 한다. 보통 시세가 킬로 당 100원이라고 하면 이곳에선 1000원에 사온다. ‘비싸게’ 사올 수 있는 비결을 기우진 대표는 이렇게 설명한다.

▲ 열악한 환경에서 제대로 된 노동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폐지 줍는 어르신들에게 비싸게 폐지를 사와 작품으로 재가공해서 부가가치를 만들고 그 이익을 다시 어르신들에게 돌려주는 사회적 기업 러블리페이퍼 기우진 대표는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이 일을 하고 있으며 더 많은 크리스천들이 동참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많은 가치 창출하는 나눔
“어르신들에게 시세보다 10배 더 드리고 사온 폐지를 재활용해서 캔버스로 만듭니다. 통상 박스 두 개를 1킬로라고 보면 여기서 캔버스가 열두 개 나옵니다. 재능기부를 받아 여기 그림 등을 그려서 작품을 만들면 평균 3만원에 팔 수 있고, 12개면 36만원을 모을 수 있죠. 이렇게 부가가치를 만들어서 팔기 때문에 다시 폐지를 높은 가격에 사올 수 있죠. 어르신들에게 최저임금 정도는 받을 수 있게 해드리고 싶어서 시작했습니다.”

러블리페이퍼는 굿페이퍼에서 시작됐다. 굿페이퍼는 단순히 폐지를 모아 소외된 어르신들을 돕던 인천의 사회봉사단체였다. 2013년 경, 인천의 기독교대안학교인 푸른꿈비전스쿨 교사였던 기우진 씨는 쓰레기 분리수거 과정에서 폐지에 주목하게 됐다. 

“폐지를 분리수거하면서 폐지 줍는 어르신들에게 관심을 갖게 됐고요, 학교, 교회 등에서 나오는 폐지를 기부 받아 판매한 수익금으로 어려운 형편의 어르신들을 돕는 굿페이퍼를 만든 거죠. 그런데 갑자기 폐지 가격이 급락해서 어르신들을 도울 수 없게 된 거예요.”

폐지를 재가공해서 캔버스로 만들고, 여기 재능기부를 더해 상품이 되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러블리페이퍼라는 사회적 기업을 탄생시켰다. 이 활동을 통해서 경제적인 부가가치뿐만 아니라 사업의 모든 과정마다 더 큰 정신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폐지를 모으고, 자원을 재활용하고, 캔버스를 제작하고, 재능기부자들이 그 위에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을 다시 사람들이 구입하는 과정에서 환경에 대한 가치와 소득 불균형을 바로잡는 문제에 더 많은 이들이 동참하는 사회적 운동이 됐다.

“이 일을 하면서 세 가지 고민을 하고 있어요. 하나는 사회적 움직임에 관한 것인데, 종이 나눔 운동이 그것이고요. 둘째는 경제적 움직임인데, 사업구조상으로 좋은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그 가치로 어르신들을 돕는 일이고요. 셋째는 올해 주력할 일인데요, 정책적 움직임입니다. 이 캠페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시민운동이 되면 이와 관련된 국가정책에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거든요.”

▲ 새벽부터 폐지를 주우러 다니는 노인, 그러나 하루 종일 주워도 최저임금의 10분의 1 벌기가 쉽지 않다.

교회 지역선교에 딱맞는 활동
기 대표는 같은 교회에서 만난 권병훈 공동대표와 함께 이 일을 하면서 각 교회나 학교 등에서 이와 관련된 강연을 통해 사회적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있다. 또 학교에서 특별활동 시간에 학생들이 직접 가져온 폐지로 캔버스를 만드는 활동을 하면서 노인 문제와 사회적 책임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캔버스에 재능기부자 뿐 아니라 더욱 실력 있는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이익의 일부를 공유하면서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그 동안 몇 차례 전시한 작품들은 모두 팔렸고 세대를 초월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내주고 있다. 교회 역시 이 활동에 동참하면 지역 선교에도 많은 유익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저희 일이 특정 종교와는 무관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처음에 굿페이퍼를 할 때에 이건 교회가 그 지역 선교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굿페이퍼’나 ‘러블리페이퍼’도 기독교 정신을 담고 지은 이름입니다. 교회에도 주보나 성가대 복사물, 안 쓰는 책, 신문들이 많죠. 또 교인들이 얼마든지 폐지를 모을 수 있고요. 차가 있으니까 한 달에 한번정도 수거할 수도 있죠. 그래서 그 폐지를 저희에게 가져다 주셔도 되고요, 교회에서 그걸 팔아서 지역 어르신들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교회가 지역사회에 뿌리내리는 나눔 운동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 덕에 어린 청년으로 보이지만, 30대 중반에 두 아이의 아빠인 그는 현재 인천 만수중앙감리교회(담임:황규호 목사)를 출석하는 ‘집사님’이다. 러블리페이퍼 활동뿐만 아니라 기독교대안학교 교사로 일하는 것도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사는 신앙적 결단에서 비롯됐다. 

처음 그가 교회 문턱을 넘은 건 수능 끝나고 나서였다. 별로 할 일도 없었던 그때에 교회 다니던 친구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교회에 가면 여자가 많아!’ 그 말에 교회를 나갔는데, 정말 교회 청년부에서 만난 집사람과 결혼까지 했다. 그렇게 시작된 믿음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며 삶을 변화시켰다.

2002년 7월 4일,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날 하나님을 만났다. 그전에도 학교에서 조이선교회에 들어가 성경공부도 하고, 믿음은 부족했지만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도 했다. 그러나 이런 체험은 없었다. 그날 말씀 중에 오시는 하나님을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한다.

▲ 폐지수거중(맨 왼쪽 기우진 대표, 맨 오른쪽 권병훈 대표)

하나님을 만난 후의 변화
“주체할 수 없었어요. 울고, 불고 그랬죠. 오늘이 나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 후로부터 많이 바뀌어갔습니다. 술도 안 먹고 밥 먹기 전에 식사기도도 하게 됐죠. 그 후 하나님이 제게 부어주시는 사명에 민감하게 됐고요. 그때 세운 비전이 하나님의 학교를 세우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자녀들을 양육하고 싶었어요.”

한국사회가 교회를 대하는 눈이 곱지 않은 시대다. 특히 젊은 세대는 더욱 그렇다. 그는 수업 시간에 기독교적 세계관을 녹여서 한국사를 가르치는데 이것이 쉽지만은 않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주고 있는 분위기가 그는 안타깝다.

“저희가 이 일을 하면서 크리스천이라고 떠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묵묵히 이 일을 하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 이렇게 알아가는 게 좋겠죠. 기독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이 일을 계속 한다면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가 이 활동에 적지 않는 것들을 쏟아 붓고 있지만 물질적으로 얻는 건 전혀 없다. 수익금이 많이 남을 것도 없고 가져갈 것도 없다. 그러나 그가 가져갈 수 있는 게 있다. 바로 어르신들의 구수한 사랑이다. 

엊그제는 한 어르신이 ‘한번 껴봐’, 하고 반지와 넥타이핀을 선물로 주셨다. 극구 사양했는데, 이번 설날에 장인어른에게 인사갈 때 잠바 대신 와이셔츠 정장에 하라고 주셨다. 그에게 주려고 동전 지갑에 넣고 기다리셨단다. 그리고 사랑이 담긴 핀잔을 던지셨다. ‘또 감기 걸렸어? 감기는 왜 이렇게 자주 걸려?’

전부터 찬송가를 듣고 싶어 하셨던 그 어르신에게 요즘은 구하기 힘든 찬송가 테이프를 구해서 카세트와 함께 드렸다. 재생과 멈춤 버튼을 색깔로 표시해드리니 더 좋아하셨다. 폐지가 맺어준 사랑이다. 세상에서 버려진 폐지가 거듭나 작품이 되고, 사랑이 됐다. 밖을 나오니 영하 10도 아래로 뚝 떨어진 추운 날씨, 그러나 세상은 아직 훈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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