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운동 재정비할 성경적 갱신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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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운동 재정비할 성경적 갱신교과서
  • 승인 2003.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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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가 목회현장에서 매우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갖는 성경적인 원칙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해야만 하는 목회자들은, 그들을 가르치고 말씀으로 먹이는, 이른바 양육하는 것을 사역의 주요내용으로 하는데 일관된 원칙이 없다면 우왕좌왕하고 때로는 육신의 뜻대로 때로는 전통적인 관습대로 적용하는 등 비교육적인 상황을 연출할 것이다.

칼빈주의는 종교개혁시대를 거치면서 칼빈을 따르던 사람들의 사상까지 포함된 것으로, 어쩌면 목회현장에 적용하기 어려운 학문적인 영역에서 더 선호된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개혁시대를 사는 현대21세기 초 한국교회가 칼빈주의에 주목해야할 이유는 단 하나, 한국기독교의 왕성한 개혁추진력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칼빈주의로부터 떠난 방만한 목회운영을 칼빈주의라는 거울로 투영시켜 힘찬 미래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이 대목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은, 아직까지 칼빈주의의 기초조차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목회자가 예상외로 적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이것을 교리로 채택하는 장로교단 목회자들은 칼빈주의의 기본 내용인 예정론이나 삼위일체론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필수임에도 본인 스스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할 만큼 저조한 상태다.

원종천교수(아세아연합신대)도 “한국교회의 예정론 이해는 칼빈 자신의 견해보다는 정통주의에서 발전된 예정론에 더 근접해 있다”고 평가하면서 “인간이성의 제한성이나 영적인 유익보다는 규격과 틀에 잡힌 논리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하고 있다”고 밝혀 왜 목회현장 적용이 어려운지 시사하고 있다.

쉬운 말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이 예정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은 절대 칼빈의 예정론과 무관한 몰이해라는 것이다. 사고가 나서 다치고 죽고, 전쟁이 일어나 대량살상이 벌어지는 참혹한 상황이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인지 여부를 가르치는 것은 예정론과 관계없는 말장난이다.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빼놓고서는 절대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으로, 예정론을 통해 만유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그 같은 분조차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함으로써 인격체로 대하셨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야하는 것이다. 칼빈의 예정론은 결국 하나님이 무엇을 알고 모르고가 아니라 자신의 계획을 수행하시되 인격체인 인간의 반응을 수용하며 최종적으로는 그 계획을 완수한다는 줄거리를 갖는다.

또 하나, 삼위일체론도 사실 목회현장에서는 다루기 꺼리는 부분 중 하나다. 삼위일체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세 위격인데 합하여 하나”라는 식이다. 세가지가 결국은 하나인데 성부도 되고 성자도 되고 성령도 된다는 양태론을 수용하는 듯 하다.

남포교회 박영선목사는 이 부분을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독립된 존재가 똑같은 인격성, 성품,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에 신비스러움이 조명돼야 한다. 삼위일체에서 ‘일’은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같은’ ‘동등한’(same)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내용 중 우리가 간과한 부분은, 성만찬을 도외시한다는 점이다. 칼빈은 성만찬을 “영적인 교환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신비적 체험”이라고 했다. 칼빈은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가장 효과적인 교제가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한국교회는 적어도 목회적 현실을 놓고 볼 때 성만찬은 고작 절기예배를 치장하는 부속물로 여겨지는 경향이 짙다.

신앙의 신비함을 도모하거나 신앙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부분으로 보다는 행사 중 하나로 치러지는 것 같다. 신비적 체험은 오히려 오순절교단의 성령은사체험이 강한 편이다.

이 운동은 칼빈과 청교도와는 무관하게 19세기 미국 성결운동으로 출발된 부흥운동이 오순절운동으로 전개된 것으로, 한국교회가 영향을 받은 것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부분은, 종교개혁가들이 주창했던 “오직 믿음으로”라는 슬로건이 반율법주의를 부추겨 현대시대에서 기독교인의 비윤리행태를 방조한 책임은 없느냐는 질문에 응답해야 할 시점이란 사실이다.

‘칭의’에만 몰두했던 목회현장은 최근들어 ‘성화’에 신경을 써야할 만큼 성도들의 삶은 매우 열악해졌다. 씻겨졌다고 믿었던 죄성이 다시 고개를 쳐든 형국이다. 목회자들도 예외없이 주목해야할 ‘성화’문제는 성도들의 삶 속에서 하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는 칼빈의 가르침을 또 한번 어기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칼빈주의는 학문이 아니라 개혁현장에서 피어난 혁명의 꽃이다. 반드시 목회현장에 적용돼야 할 실천적인 교과서다. 개혁을 요구받고 있는 최근 상황에서 칼빈주의는 어쩌면 해묵은 이론서로서가 아니라 갱신교과서로 새롭게 태어날 수도 있다.

윤영호차장(yyh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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