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은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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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은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
  • 서진한 목사
  • 승인 2016.10.18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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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한 목사·대한기독교서회 사장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한국교회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종교개혁에서 ‘종교’(宗敎)는 한자말로는 ‘으뜸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으뜸 가르침은 근원적인 것에 대한 가르침, 곧 진리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 뜻풀이는 역설적으로 종교는 진리가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다. 종교는 단지 진리에 대해 가르칠 뿐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종교가 가르치려고 하는 진리는 ‘가르친다’고 하기보다는 ‘가리킨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무한한 신에 관한 진리는 유한한 사람이 결코 다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종교의 ‘가르침’은 진리를 똑바로 쳐다보게 하는 ‘가리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종교는 진리를 바르게 가리키는 손가락, 곧 직지(直指)다. 만약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본다면 낭패다. 예를 들어 목회자가 신도들로 하여금, 자신이 가리키는 진리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가리는 죄악이다. 직지라는 말은 1377년에 제작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책인 『직지심경』(정식 명칭은 『직지심체요절』)에 실려 있는 불교용어이지만, 기독교인으로서도 새겨볼 만한 측면이 있다.

흔히 종교개혁하면, 즉각적으로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총으로만’ ‘오직 성서로만’이라는 주장을 떠올린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 주장들은 종교개혁의 핵심적인 신학적 표현이다. 하지만 이 주장들을 금과옥조처럼 되뇌기 전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이 주장들 자체만 본다면, 우리는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보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눈앞에 있는 교회 현실을 당대의 자리에서 비판한 것이 아니라 근원으로, 처음으로 돌아가 그 처음의 자리에 서서, 그 눈으로 바라보고 비판했다. 성서를 깊이 연구하고, 라틴어로 된 성서를 자국어로 번역한 것은 기독교신앙의 처음으로, 근본으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이었다. ‘오직’(Sola)이라는 주장들은 그 노력에서 산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모름지기 모든 비판은 그 근거가 있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비판은 근원적인 자리, 본래적인 자리를 그 근거로 삼는다. 교회의 본래 모습을 내세우면, 그것은 본래 모습과 크게 달라진 지금의 교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된다.

한국교회 현실에 대한 비판이나 염려만큼 요즘 교회가 가진 걱정거리 또한 많다. 사회의 냉시와 비판, 교인 수의 지속적인 감소, 주일학교와 중고등부 학생 수의 급감, 헌금의 전반적인 감소, 무리한 건축으로 인한 교회 건물 경매현상 등이 그것이다. 사회를 향한 교회의 고민도 많다. 차별금지 문제, 동성애 문제, 북핵 문제, 이슬람 문화와 종교 확장 문제 등으로 시끄럽다. 위기의식이 점증하고 있고, 그에 따라 기독교회가 결속해서 힘을 보여주고 영향력을 증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그러나 어려울 때일수록 처음으로, 근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고 해소하는 데만 몰두해서는 근본적인 처방을 마련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교인 수가 감소한다고, 성장과 전도의 새로운 방법 찾기에만 치중해서야 어찌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하겠는가? 생각을 바꿔보면, 교인 수를 증가시키는 것보다 참된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대립과 대결을 주장하기 전에, 그것이 신앙에 비추어서 왜 문제인지, 문제라면 어떤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신앙적인지를 깊이 숙고하고 논의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을 논하는 지금의 한국교회에 가장 시급한 것은 16세기 종교개혁의 ‘오직’(Sola)을 외우고 해석하는 것을 넘어, 종교개혁자들처럼 처음, 근원, 본래로 돌아가려는 치열한 노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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