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열망 부추기는 화려한 목회테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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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열망 부추기는 화려한 목회테크닉
  • 승인 2003.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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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지도 믿지도 않으면서도 자기신념에 따라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성경의 가르침들에 옳다고 찬동하고, 잠시 열정적으로 복음에 헌신하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경외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구원의 말씀들을 진실하게 믿을 수는 없습니다. 또 단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경건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최근 출간돼 교계의 주목을 받고있는 ‘디지털기독교강요’에서 저자 김준수목사(성덕중앙교회 담임)는 영적체험없이 자기 신념에 따라 교회활동을 하는 현대기독교인의 경향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하나님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구원을 말하고 성경에 찬동하며 헌신하는 사람들을 걱정하면서 한편으론 교회의 이같은 ‘무감각한 현상들’을 간접 비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던 일생동안 육신의 법과 영의 법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싸우는 바를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솔직히 고백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매일 수없이 이루어지는 영적각성의 중요성을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교훈하는 대목이다.

위에서 밝힌 디지털기독교강요의 현대신앙인과 로마서의 사도 바울은 사실 겉모습만 보아서는 무엇이 참신앙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양자 모두 헌신과 정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사도바울의 헌신은, 영적각성을 통해서 이루어진 ‘결단의 헌신’인 반면 디지털기독교인의 헌신은 자기신념에 따라 이루어진 ‘제도적 헌신’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영적각성없이 이루어진 교회부흥의 현상들이 매우 참담하다는 것이다. 부도덕과 비윤리가 난무하는 세속 앞에서 그 어떤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는 교회의 현재 위치가 그렇고, 연속되는 한반도 긴장과 핵 무기문제 그리고 세계곳곳에서 드러나는 소리없는 폭력 앞에서 조차 묵비권을 지켜야 하는 교회의 무너진 리더십에서 부흥의 참담한 결과를 체험하고 있다.

기계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이같은 결과들을 보면서 우리교회 안에 제도화된 헌신- 자기신념에 따른 열정- 이 ‘결단의 헌신’보다 더 많은 것은 아닌지 되돌아 봐야할 시기다. 외형적인 성장을 놓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침체되는 영적 파워를 보며 슬퍼해야 한다는 자성의 소리가 나오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초기 한국교회와 디지털 시대 한국교회는 각각 치중했던 분야가 다른 것같다. 초기에는 영적각성에 치중,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을 고쳐잡는 현대화작업에 힘입어 거족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반면 70년대 이후 한국교회가 치중했던 ‘성장’은 경제발전 정책과 맞물려 이른바 ‘국가정책과 비례관계’를 형성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뿌리를 영적각성에 둔 초기 한국교회는 일제식민지와 이념갈등, 한국전쟁 등 한국현대사의 커다란 시련 앞에서도 굳건히 교회자리를 지켰으나 ‘성장’을 모토로 삼은 7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조그마한 비판에도 발끈할 정도로 신앙두께가 얇아지는 경험을 피할 수 없었다.

최근 한국교회는 성장 이외에 다른 구호는 찾기 힘들 정도다. 이미 다 커버린 대형교회 조차 과거보다 더 완벽한 성장방안을 마련하느라 북새통인 현재의 우리 기독교는, ‘분야별 특성화 만들기’에 새로운 장르를 창출했다.

어린이 교회학교 성공모델교회, 대학부 성공모델 교회, 경배찬양예배 모델 교회, 성공적인 소그룹 모델교회 등 ‘특성화전략’을 목회에 적용, 기독교계의 새 장르를 개척했다.

이같은 특성화 목회가 개교회까지 적용될 무렵인 10년 전, 성장이란 목표달성을 위해 한 교회가 취했던 정책은, 교회 속에 침투한 ‘맘몬의 영’의 위력을 실감케 한다.

경기도 과천시의 모 교회는 성장정체라는 조바심 속에서 경배와 찬양식 예배 도입을 결정했었다. 문제는 적어도 30-40분 가량 서서 찬양하는 이같은 예배스타일을 노인층이 매우 버거워했다는 점이었다. 당시 담임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교회 정책에 맞지않으면 못나오는 거죠, 다행히 방식을 바꾼 결과 성장하는 모양이 보이니 효과는 좋다고 봐야죠.” 이 교회 일부 노인들은 얼마못가 출석출석을 하지 않았다. 이미 이데올로기화한 성장정책은 변화 속에서 소외되는 ‘힘없는 약자’에 대한 배려 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목회특성화 경향은 사실 기능만능주의를 조장할 위험이 있다. 교회 내 교육파트 전담사역자들은 세분화돼 있는 교회구조 때문에 다른 파트와 연관성보다는 자신이 맡은 분야에만 치중하게 된다.

그래서 매끈한 프로그램 진행자를 선호하는 방송국처럼, 특성화교회는 교육훈련이 고도화된 전담사역자를 찾는데 시간과 물질을 할애한다. 최근 대기업 삼성이 추구하는 인재양성론은 제대로된 정책임에도 그것이 교회에 무비판적으로 적용될 경우 ‘교회다움을 해치는 부작용’을 초래한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한다.

성장이 최고의 미덕으로 자리잡은 오늘날 부교역자들은 새로운 목회프로그램을 찾아 갖가지 잡지들을 탐독하고 적용하는 노력을 반복하고 있다. 물론 이같은 과정은 꼭 거쳐야할 목회의 기본이지만 기능주의가 판치는 현대사회의 분위기를 전제한다면 꼭 장려해야할 것만은 아닌 듯 싶다.

강단에서는 “육신의 법은 사망이요 영의 법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설파한 사도바울의 교훈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속의 성공기술을 배우기에 바쁘다. 반대로 성공기술이 미숙한 교역자들은 기능주의 가장자리에서 밀려나 결국 도태의 길을 걷기도 한다. 이같은 기능주의에 편승해 수년전부터는 교회성장을 돕는 전문업체까지 등장하고 있다.

교회개척을 위한 지역컨설팅을 한다든지 설교개발을 위한 스피치세미나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성장이 곧 성공인지 세속적 답은 확실하지만 기독교적 답은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다. 물질적인 부요함을 ‘부(富)’로 믿는 세속가치관을 반대하는 이유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를 사는 지금은 교회의 명확한 ‘반대이유’가 사라진 시대를 살고있어 더욱 참담한 것이다.

윤영호차장(yyh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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