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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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철학
  • 승인 2003.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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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에서 깨어난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강을 떠나 바다에서 3,4년을 지낸 다음 수만 킬로미터를 여행, 모천(母川)으로 회귀한다.’ 실직으로 가슴앓이를 하던 시절,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다가 정신이 번쩍 드는 한 구절을 만났다. ‘절망은 청년기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다.’

앞날에 대한 불투명함으로 세상 고통을 혼자 짊어진 듯 씨름하던 나는, 뜻하지 않는 위안을 받았다. 절망이 인류 보편의 것이라는 덴마크의 그 고독한 철학자의 말이 나에게는 왜 그토록 위안이 되었던 것일까.

불안, 고독, 질병, 궁핍, 우수, 회한 등 인간에게는 어찌할 수 없이 절망의 색채가 주어져 있다고 본 키에르케고르는, 그 자신 이런 절망의 조건들과 투철하게 싸운 기독교 사상가요 철학자이다.

아내를 잃은 후 아내가 살아 있을 당시부터 관계를 가졌던 하녀와 결혼을 한 아버지, 자신이 바로 그런 부모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청년 시절의 그는, 엄청난 ‘대지진’을 경험하게 된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삶이 축복이 아닌 저주요, 감당할 길 없는 형벌로 탈바꿈한다. 마음을 사로잡은 소녀와 약혼까지 했다고 파혼을 선언하고 독신을 고수한 것도, 이러한 ‘대지진’이 그에게 끼친 영향의 결과다.

그는 생래적인 조건으로 주어진 고독이나 불안, 절망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맞서 싸웠다. 인간을 좀먹는 ‘절망’의 병균이란 바로 ‘신을 떠나서, 신을 상실하고 있는 상태’라고 규정짓고, 그러한 병에서 치유될 수 있으려면 ‘신 앞에 홀로 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인간의 자기 회복은 자기 안에 있는 ‘신을 회복하는 것’임을 역설한다. 철새들은 지도와 나침반이 없이도 대해와 사막을 가로질러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하여 정확히 제 갈 길을 찾아간다.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강을 떠나서 바다에서 3,4년을 지낸 다음 수만 킬로미터를 여행하여 정확하게 모천(母川)으로 회귀한다. 가장 미미한 단세포 동물조차도, 아니 세포 하나만 떼어놓고 보더라도, 엄청난 기적의 산물이다.

논리나 과학으로는 풀 길이 없는 생명의 신비는 한도 끝도 없다. 그러니 절망한다는 것은 내 안에 깃든 신비, 다시 말하자면 ‘신의 비밀’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삶을 부여한 신의 뜻을 거부하는 의사표현이 절망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을 믿는 종교이다. 예수께서는 “나를 믿으면 죽어도 다시 살겠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희망이야말로 우리가 일용해야 할 양식이다. 진정한 마음의 양식이다. 억만금을 소유한 재벌이라도 절망하는 경우가 있지만, 희망을 품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 희망은 우리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활력을 가져다준다. 위인이란 환경이나 지식이나 다른 조건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운명의 여신이 만드는 것도 아니다. 희망이 위인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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