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 안의 형제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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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 안의 형제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고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6.05.26 1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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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교도소 교정위원 김정옥 목사
▲ 광주교도소 교정위원 김정옥 목사는 "수용자들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이 특별한 사랑을 부어주신다"고 말한다.

지난 제53회 법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은 김정옥 목사. 법무부는 김 목사가 “13년 동안 수용자, 사형 확정자 등을 지속적으로 살폈을 뿐 아니라 불우수용자 생활비 지원 등 수용자에 대한 정서적, 경제적 지원을 통해 교정교회에 헌신적으로 노력했다”고 표창 이유를 밝혔다.

오랜 세월 동안 교도소 수용자들의 ‘펜팔 지기’로, 상담자로, 도우미로, 친구로, 그리고 목사로 그들의 곁을 지켰던 그는, 사실 처음부터 이런 사역을 하겠다고 맘먹은 적이 없다. 무엇보다 그는 겁이 많다. 이들을 처음 만났을 땐 목회자도 아니었다.

으스스한 감옥에서, 살벌한 포스를 뿜어내는 수용자들을 상대로 뭔가 해볼 만큼 센 여장부 스타일도 아니다. 친구들은 그가 운전하는 걸 보고도 ‘네가 어떻게 운전을 다 하니’라고 할 정도로 그는 여리다. 그런데 지금까지 수천 명의 수용자들을 도왔다. 어디서 이런 깡이 나왔을까?
 

가볍게 시작된 큰 사역
“집사로 있을 때, 전도 일 때문에 교회 사무실을 갔는데 부목사님께서 교도소 수용자들에게 편지 보내는 일을 혼자 감당하기 힘들다고 좀 도와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열통 만 써주면 안 되겠느냐고요. 전 연애편지 한번 안 써봤다고 했죠.”

그렇게 시작된 수용자들과의 편지 교환, 의외로 재미있었다. 한번 앉으면 열 몇 통은 금방 써내려갔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런 저런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되니, 그냥 몇 줄 상투적인 위로만 던져주고 외면할 수 없었다.

사비를 털어 생활지원금도 넣어주게 되었고 어려운 형편을 따라 도울 길도 찾았다. 면회를 가더라도 그냥 빈손으로 찾아갈 수 없었다. 빵이라든가 다과를 준비해서 갔다. 어디서 지원을 받지 않았으니, 김 목사는 남편과 함께 조금 덜 먹고 덜 쓰면서 그 돈을 충당했다.

“맨 첨에 세 명으로 시작했어요. 수용자 세분과 기독교 동아리 활동을 시작한 거죠. 기타를 조금 배워 가지고 들어갔는데, 그중에 한 형제가 저보다 잘 치더라고요. 허락을 받아 그 형제가 기타로 반주를 하고 함께 찬양을 불렀죠. 지나가는 사람들도 은혜를 받았던 기억이 새롭네요.”

그 자신이 생각해도 희한했다. 수용자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도움을 나눌 만큼의 특별한 사랑의 은사가 그 자신에겐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도하면, “예쁜 우리 형제님들 보게 하시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시작된다. 정말 그들이 예쁘게 보인다.

“저만 아는 제 성격이 있거든요. 형제가 8남매인데, 모이면 저보고 ‘저 고집쟁이’라고 할 정도로 제가 떼도 많이 쓰고 그랬어요. 엄마 젖도 여섯 살까지 먹었다고 하고요. 그런데 어려서 집이 과수원을 했는데 음식을 하면 서로 나누고 그걸 이웃에게 심부름하면서 나눔을 좀 배운 것 같아요.”

처음 교도소를 찾아갔을 때만 해도 지금보다 더 무서웠다. 지금은 지문인식으로 좀 더 세련된 느낌을 주지만 그땐 쇠창살로 된 문을 자물쇠를 열고 몇 겹이나 통과해야 했다. 들어가 보면 어떤 사람은 “소름이 오싹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어린 시절 습관이 중요

“그래서 제가 생각해요.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요.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사명이죠. 남자 분들이 보기에 천상 여자로 여려 보이는데 남자 수용자들을 그렇게 씩씩하게 상대한다고 신기해하죠.”

수용자들이 교도소에서 잘 생활하고 나중에 나와서 사회에 잘 적응하기 위해선 교도소 밖에 있는 가족의 역할이 중요하다. 김 목사는 그래서 교도소 밖에 있는 수용자들의 가족까지도 찾아가 상담하거나 도울 때가 적지 않다.

“어떤 재소자가 자기 부인을 걱정하더라고요. 그래서 광주에서 경기도 문산까지 그 부인을 찾아간 적도 있어요. 친정엄마랑 분식집을 하더라고요. 추운 날씨라 손이 얼었어요. 얼마나 힘들겠어요. 사실 남편과 안 살고 싶은데 하나님 때문에 못 헤어진다고 하더라고요. 같이 언 손을 붙잡고 울었죠.”

어떤 수용자의 부모님을 찾아가서는 밤을 꼴딱 새운 적도 있다. 동네에서도, 교회에서도, 어디서도 이야기할 수 없는 답답한 마음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아들이 아무리 봐도 천사인데 그 속에 어떻게 악한 것이 들어가서 교도소에 갔는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을, 졸리는 눈을 억지로 뜨고 들어주기도 했다.

수용자들의 걱정거리는 이렇게 교도소 밖에 있는 아내, 부모, 그리고 자식이다. 어떤 수용자의 아들은 ‘일진’이 되어 경찰서에 들어갔다. 그 아들을 찾아가 “넌 훌륭한 사람이 될거다”라고 다독여주고 왔다. 이런 일은 끝이 없다.

“그렇게 도와주고 말씀을 전하고 같이 예배 드렸던 형제가 출소해서 새사람이 되어 잘 살면 참 보람도 큽니다. 24년 넘게 감옥에 있다가 나와 학사고시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가고 결혼도 하고 목사과정을 밟고 있는 형제가 있어요. 참 감사하죠.”
안타까운 때도 있다. 출소했다가 다시 들어오는 걸 보면, 답답한 마음에 수용자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해도 너무 해”하고 속마음을 터뜨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나 허물이 있고 고치지 못하는 습관이 있는데 누가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형제님들을 보면 인물도 멀쩡하고 재주도 많고 얼마든지 건전하게 살 수 있는데 그렇게 못하거든요. 습관 때문이죠. 내내 그런 길을 걸어왔으니 쉽게 바꾸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어릴 때가 중요한 것 같아요. 어린 시절에 반듯한 아이로 자랄 수 있도록 가정과 학교와 교회가 힘을 써야 합니다.”

▲ 그가 운전하는 걸 보고 친구들이 신기하게 생각할 정도로 마음이 여리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니 교도소 안의 형제들이 그렇게 예뻐 보인다고 한다. 사진은 상을 받는 모습.

사형수와 드리는 예배
마침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이 지났다. ‘와보라교회’를 개척해서 이렇게 교정사역을 하고 있는 김 목사에게 어떤 동료 목사들은 헛고생한다며 안쓰럽게 보기도 한다. 일반 목회를 하면 그래도 명절 때나 이런 날에는 목사님께 감사한다고 뭐라도 오는데, 교정 사역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건지는 것이 없지 않느냐는 것.

“아네요. 거기도 있어요. 광목천에 먹물로 예수님을 그려서 주고요, 어버이날에는 택배로 카네이션도 보내줍니다. 종이접기 바구니도 주고요. 수용자들이 그 안에서 투박한 손으로 예쁘게 접은 종이접기를 보면서 기도하죠. 그 예쁜 마음씨, 솜씨로 복음을 안고 살라고요.”

무엇을 줬다고 그만큼 받는 기쁨이 아니다. 그저 함께 하는 기쁨이다. 때로 사형확정자와 함께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사형확정자는 일 대 일로만 만날 수 있다. 옆엔 보안팀이 지킨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김 목사와 사형확정자, 단 둘이 예배를 드린다. 단 둘이지만, 수천 명이 드리는 세상 그 어떤 예배보다 은혜롭다.

“사비를 털어서 일하는 걸 보고 저보고 후원을 받으라는 친구도 있는데, 제가 성격상 누구에게 도와 달라고 못해요. 그냥 내가 벌어서 하는 거죠. 남편과 그저 조금씩 아끼고 모아서 이 일을 하고 있죠. 그래도 감사한 건 아들 하나 있는데 하나님께서 잘 자라게 해주셨어요. 작년에 결혼한 아들이 전대 의대 레지던트로 근무하고 있고 며느리 역시 의사에요. 감사하죠.”

벌써 십 수 년 동안 수천 명의 수용자들을 만나며 별별 일을 다 겪었겠지만 그는 오늘도 담 안의 형제들을 만날 생각을 하면 가슴이 들뜬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또 축복의 통로로 쓰실까, 기대가 된다.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도 담 안의 형제들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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