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눈 뜨게 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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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눈 뜨게 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6.04.27 17: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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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장애인 대상(장애극복 부문) 수상 심영숙 남산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 관장

심영숙 관장의 손목에는 흉터가 있다. 감추고 싶은 죽음의 자국이다. 그는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그럴 만 했다. 스물세 살, 정말 꽃다운 나이에 그는 감당키 어려운 일을 당했다. 1988년 봄이었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온 가족이 봉고차를 타고 부모님께 인사 다녀오던 길이었다. 좋은 봄날에 온 가족이 모였으니 유쾌한 여행길이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드라마 속의 한 장면처럼 뿌연 안개 속에 보이는 사람들.

중환자실이었다. 교통사고가 난 것이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그는 타격이 컸다. 보름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걸어 다닐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도록 다리는 꿈쩍도 안했다. 이상했다. 간호사에게 물었다.

▲ 23살의 꽃다운 나이에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어 하반신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심영숙 권사는 몇차례의 자살 시도까지 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남산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 관장까지 되는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심 권사는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를 가장 좋아한다면서 대구시 장애인 대상(장애극복 부문)까지 수상하게 된것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신앙으로 마음부터 ‘재활’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주시던 간호사가 냉정한 얼굴로 싹, 바뀌면서 그러는 거예요. ‘심영숙 씨, 암환자가 기적으로 낫다는 이야기 들어보셨어요?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못 일어날 거예요.’”

충격이었다. 교통사고로 인한 신경 손상으로 지체1급 중증중도장애. 가슴 이하 부분이 마비됐다. 다신 걸을 수 없다. 순식간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 때문에 고생하는 엄마”가 곁에 있어서 참았던 눈물은, 엄마가 자리를 비우자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살 순 없다는 맘이 들었다. 자살을 기도했다, 그것도 여러 차례, 오만 가지 방법을 다 생각했다. 그러나 죽는 것도 맘대로 안됐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이 탁, 들었어요. 죽을 운명을 내가 타고 났다면, 의사 선생님이 제가 사고 낫을 때 살 확률이 50%도 안됐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그 때 죽었어야 했는데 살아남은 걸 보면 죽을 운명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죠.”

그러면 살아야 했다. 어떻게 살까, 그런 시각으로 보니, 아직 남아있는 게 많았다. 손도 있고 입도 있고, 생각할 수 있는 머리도 있었다. ‘살아보자’는 마음이 실낱같이 피어났다.

“어렸을 때에 교회 갔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병상에 누워서, 내가 교회를 나갔어야 했는데, 예수님을 믿었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그러나 쉽게 교회 나가지 못했어요. 92년에 교회에 등록을 했는데, 그전까지 5년 정도는 방황을 많이 했죠.”

장애의 ‘장’자만 나와도 책을 던지고, 들고 있던 리모컨을 던졌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면서 조금씩 안정돼갔다. 장애인선교회에서 다른 장애인들을 만나면서 ‘이런 세계도 있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목사님, 장로님을 비롯한 많은 교회 분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마음이 재활되기 시작했다. 돕는 손길들이 이어졌다(대구남산교회 출석).

▲ 사고 당하기 전, 꽃다운 나이 이십대 초반에 어느 공원에서.

‘다리’가 되어준 은인들

“다치고 난 후에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게 됐어요. 집이 너무 가난해서 등록금 낼 돈이 없었어요. 제 상태가 또 무슨 돈 벌 여건도 안 되고요. 그때 ‘한 달에 5만원만 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을 때였는데요.”

어느 날 변호사로 일하시던 장로님이 그에게 제안했다. ‘나에게 아르바이트 한번 안 해볼래요?’ 장로님의 사무실을 거친 분들에게 ‘이슬비전도편지’를 보내는 일이었다. 몇 통을 보내든지 상관이 없었다. 한 달에 35만원씩 4-5년을 받았다. 95년 당시로 적지 않은 돈이었다.

초등학교 동창인 김인수 집사는 그의 다리가 되어 주었다. 운전면허를 따러 학원을 다니는 모든 과정을 도와주었고, 차 없을 때에는 차를 빌려와 어디든지 데려다 주었고, 모든 신앙수련회 때마다 업고 참석해준 친구다.

96년쯤에는 이런 일도 생겼다. 직장생활을 하려고 차를 하나 할부로 구입했다. 하지만 할부 갚을 돈이 부족해 늘 지쳐 힘들어할 때였다.

“어느 날 아침에 전화가 왔어요. 한번인가 만난 분인데, 기도하는 중에 자꾸 제가 생각난다면서 1천만 원을 보내주셨어요. 담당 목사님이, 그 돈이면 가게 하나 얻어 평생 먹고 살 수 있겠다고 하실 정도로 큰돈이었죠.”

그러나 할부금을 좀 갚은 후에는 부담감이 생겼다. ‘내가 다 써도 되나?’ 결국 다른 어려운 분에게 남은 돈 모두를 보냈다. 정말 그도 어려운 때라서 맘 변할까봐, 먼저 준다고 전화부터 했다.

“보내드리고 나서는 후회했죠. 내가 미쳤나, 그러면서요. 그런데 잘한 거죠. 제가 다친 후에 감사한 건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 볼 수 있게 됐다는 거예요. 다치기 전에는 돈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어요.”

고교 졸업 후 곧장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돈 벌려는 욕심뿐이었다. 3년 동안 직장을 다니면서 매일 돈, 돈, 돈, 돈,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다쳐서 병원을 가보니 돈으로 되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곁에 있던 환자가 죽어나가는데, 돈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는 기회를 그때 얻은 것이다.

하나님을 만난 후에 그분의 인도하심은 거침이 없었다. 대학원까지 졸업하게 됐고, 졸업해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자, 다니던 교회에 사회복지관이 생겼다. 계약직원으로 시작했지만 정규직으로 전환되고 이어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 관장까지 됐다.

▲ 천왕봉 등반대회에서

‘축복의 통로’가 되는 기쁨

“여기는 장애인복지관이 아니라 종합 사회복지관이라 장애인이 관장이 되는 일이 쉽지 않아요. 460개 복지관 관장들이 모이는 세미나를 갔는데, 저 혼자 휠체어 타고 있더라고요. 우리 교회가 앞서 나간 거죠. 2014년도엔 권사 직분까지 받았어요. 자격도, 나이도 안됐는데, 이상하게 투표하니까 됐어요. 모든 게 감사할 뿐이죠.”

복지관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장애 아동이 복지관에 와서 달라지는 모습이 보람찼다. 단추 하나 못 끼우던 아이가 옷을 스스로 입고, 화장실 못 가던 아이가 용변을 해결한다. 그 모습이 너무 기뻤다.

어느 여름날에는 혼자 사는 할머니가 물어물어 복지관을 찾아왔다. 손에든 까만 비닐봉지에 박하사탕과 이름 없는 과자 두 봉지가 담겨있었다. 복지관을 통해 냉장고를 지원받고 감사해서 찾아왔다. 그 모습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담배 피다 걸려 봉사 명령을 받고 복지관에 와 껄렁껄렁하던 아이가 봉사 후에 변화되어 어느 날 다시 찾아왔다. 첫 아르바이트 했다고 케이크 세 개를 사가지고 왔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다. 장애를 입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경험하지 못했을 신세계다.

“처음엔 다시 걸을 수 있다는 미련을 가졌어요. 기도를 간절히 했는데, 환상 중에 누군가 제게 손을 내밀고, 제가 걷는 거예요. 강대상 앞까지 걸어갔어요. 거기서 손을 거두시더라고요. 꿈이었어요. 깨고 보니 허무하더라고요. 깨서 많이 울었어요. 엄청 울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육신적으로는 걷지 못했지만, 영적으로는 걷게 됐다는 뜻이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마음도 주셨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음도 주셨다.

“제가 장애 극복 대상을 받았는데요, 사실 도움 받은 건 많지만 나눈 게 없어서 죄송해요. 제가 310장 찬송가를 좋아하거든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처음 교회 다닐 적에 이 찬송에 매일 은혜 받았어요. 이렇게 쓸데없는 자를 구속하여 주셨다고요.

아직 미혼인 그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산다. 그러나 또 많은 이들에게 그 사랑을 다시 나눠주고 있다. 그 기쁨과 즐거움이 매일 새롭다. 그는 사랑을 받고 또 주는 ‘축복의 통로’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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