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말단 공무원에서 산림청장 되기까지, 그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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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말단 공무원에서 산림청장 되기까지, 그 은혜…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6.04.06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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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숲 일구는 전 산림청장 조연환 장로
▲ 최말단 공무원에서 산림청장이 된 조연환 장로는 그렇게 되기까지 하나님의 은혜는 물론,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자신을 위해 희생해준 많은 사람들의 덕택이 컸다고 고백한다. 그는 산을 더 아름답게 살리고 사람들이 산을 통해 더 많은 유익을 얻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며 그것이 자기의 소명이라고 다짐한다.

누구에게나 살면서 잊을 수 없는 날이 있다. 조연환 장로(서울 면목동 동일교회)에게는 그날이 아마 산림청장이 되던 날일 것이다. 2004년 7월 20일 오후 2시 30분,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장면들이 있었다.

1967년, 조건부 9급 공무원 발령통지서를 받아 안동으로, 무주로 이불보따리를 시외버스 맨 뒷좌석에 싣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버스 천장에 머리를 찧으며 가던 일, 눈 쌓인 덕유산 골짜기에서 평판측량기를 내던지며 울던 일, 고시공부 한다고 다락방에서 밤새우다가 새벽녘이면 교회에 나가 의자를 눈물로 적시며 기도하던 일.

“삼림공무원 처음 시작할 땐 6급 임업주사가 되어 영림서의 계장을 해보는 게 꿈이었는데, 37년 만에 정무직인 산림청장까지 올랐습니다. 당시 언론에선 9급 말단에서 출발해 산림청장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라 기대가 된다고 인사평을 써주었죠.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난한 시절의 연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9남매의 생계를 책임지던 형이 입대하자 조 전 청장은 고등학교 진학도 어렵게 됐다. 도시 유학을 포기하고 보은농업고등학교 임과에 들어갔다. 가정 형편은 어려웠고 그가 원했던 공주사대는 실력이 부족했다. 대학을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을 봤다.

국가임업직 5급을류 시험에 합격한 그는 1967년 10월, 조건부 임업기원보로 발령이 났다. 그곳이 무주구천동. 지금은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발전했지만, 40년 전 무주구천동은 대한민국 산간오지의 대명사였다. 서울이나 큰 도시로 간 동료들을 뒤로하고 이불보따리를 매고 그 혼자 깊은 시골로 길을 떠났다.

“저 혼자 가장 시골에 떨어졌습니다. 그렇게 9급, 그것도 조건부 9급부터 시작했죠. 구천동에서 무주로, 무주에서 영덕으로, 영덕에서 안동으로, 안동에서 서울로, 한 번도 점프해 본적이 없이 한 단계씩 올라왔습니다. 7급이 되어 서울로 왔는데, 그 월급 가지고는 못살겠더라고요.”

그때 마침 기술고등고시에 임업분야가 생겼다. 고등고시를 봐서 5급이 되면 월급을 좀 많이 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학력 제한이 폐지되어 대학졸업자가 아니어도 고시 자격이 주어졌다. 부엌 위 다락에 사과궤짝을 들여놓고 공부를 시작했다.

새벽기도가 끝나면 학원에서 영어강의를 듣고 출근했다. 퇴근 후 또 학원에 들렀다 귀가하면 밤 10시가 넘었다. 아내는 저녁밥상을 차려주고 아들을 업고 밖으로 나갔다. 유치원 갈 돈이 없어 텔레비전 보는 게 유일한 재미였던 아들을 업고 밖에 나가면, 잠이 들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공부에 방해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더 힘든 건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의심과 불안이 마음 속에서 뒤엉켰다. ‘네가 기술고등고시를 본다고? 임과 대학 졸업자가 매년 수 백 명인데, 대학도 안 나온 네가 겨우 5명 뽑는 고시에 붙겠다고? 사법예비시험도 3번이나 떨어진 주제에, 주제파악을 해야지...’

▲ 조연환 장로는 지금도 숲을 푸르게 가꾸기 위해 나무를 심고 있다. 아내 정점순 권사와 함께 나무를 심고 있다.

새벽기도의 능력 체험
“그 전에, 처음에 공무원 생활 시작할 때, ‘사법예비시험’이란 게 있어서, 그걸 합격하면 대학졸업 자격과 고등고시 응시 자격을 줬어요. 그걸 시험 봤죠. 그런데 첫해에 떨어졌죠. 이듬해 또 떨어지고, 그 다음에도 또 떨어진 거예요.”

세 번째 떨어진 날, 산길을 한 시간 쯤 걸어 돌아오는 길이었다. 평소엔 무서운 길이었는데, 그날은 오히려 큰 짐승이라도 나타나면 좋겠다는 맘이 들었다. 차라리 물려 죽고 싶었다. 그렇게 사법예비시험도 세 번이나 떨어졌는데, 고등고시를 본다니, 사실 좀 말이 안됐다.

말이 안되는 일이기에, 그는 새벽마다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밖에 의지할 데가 없었다. 눈물, 콧물 쏟아가며 이런 저런 상념을 씻어냈다. 기도하면 맘이 편해졌다. 다시 책을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치른 1979년 기술고등고시 1차 시험 발표 날.

합격자 명단에 ‘조연환’이 있었다. 다시 한 번 눈을 씻고 봤다. 얼마나 감격했는지. 부엌으로 가서 아내를 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는 16회 기술고등고시 최고령 합격자가 됐다. 그의 능력의 원천이 된 새벽기도의 은혜는 더 오래 전에 시작됐다.

“군대는, 저는 안 갈 줄 알았습니다. 한번 논산훈련소에 갔다가 그냥 온 적이 있어요. 눈이 나쁘다고요. 그 이듬해 결혼했고, 영장이 계속 안 나와서 군 면제가 됐나 생각했죠. 그런데 아내가 출산을 한 달 앞두고 있는데, 덜컥, 영장이 나온 겁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만삭의 아내를 영덕의 먼 바닷가 부엌방에 홀로 두고 입대하게 됐다. 4주간 훈련이 끝나던 날, 아들을 순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저 눈물만 흘렸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그건 기도였다.

그는 동기 내무반장에게 부탁했다. 새벽 3시부터 4시 30분까지 고정 불침번을 자청했다. 다들 그 시간대 불침번을 꺼렸기 때문에 쾌히 승낙 받았다. 불침번이 끝나면 새벽기도회를 나갔다. 부대 옆 원주태장장로교회에 가서 새벽마다 울었다. 아내가 불쌍해서 울고, 자신이 못나서 울고.

“그런데요, 그때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방언 은사도 받고요, 목사님에게 신앙적으로 많이 배우고요. 그때 쌓은 새벽기도 훈련이 그 후 평생 저를 인도했습니다. 그 힘으로 기술고등고시 합격도 했고요, 산림청장까지 했다고 믿습니다.”

▲ 조 전 청장이 어렸을 때, 큰 형이 9남매 형제를 교회로 인도한 이래 지금 형제 넷이 모두 장로가 됐고 누이 넷은 권사, 또 한 누이는 사모가 되어 '믿음의 숲'을 이뤘다.

‘믿음의 숲’이 된 가정
산림청장을 지내는 동안 그는 ‘백두대간 보호특별법’ 제정, 숲 가꾸기 공공근로 사업 본격화, 수목장 도입, 숲 명예의 전당 건립 등 굵직굵직한 일들을 많이 했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 홍조근정훈장, 황조근정훈장, 녹색공무원상 등을 수상했다.

“하나님께서 최말단에서 청장까지 저를 세워주신 건, 저한테 뭔가 일을 하라고 주신 소명이 있기 때문이죠. 그것이 나무와 숲에 대한 대변자 역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청장에서 물러난 후에는 천리포수목원장을 맡았고, 지금은 한국산림아카데미 이사장으로 산림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9남매의 아버지 역할을 했던 큰 형(조창환 장로)이 교회를 나가면서 온 가족이 교회를 다니게 됐다. 어린 조연환에게 교회만큼 재미있는 데가 없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교사를 시작했다.

“교사했던 경험이 나중에 직장생활에서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아이들 가르치기 위해서 연구하고 노력했던 경험들이 직장에서 뭘 발표하거나 진행할 때에 큰 도움이 됐거든요.”

현재 9남매 그의 형제는 ‘믿음의 가문’이 됐다. 조 전 청장과 큰 형은 현재 같은 교회 원로장로로 있고 남은 두 형제도 다른 교회에서 시무 장로로 일하고 있다. 여자 형제 넷은 모두 권사가 됐고, 누이 하나는 사모가 됐다.

예수님을 영접한 이래, 큰 형이 퇴근하면 매일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렸다. 그때마다 큰 형은 이 성경구절을 읽었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5:17)

어려운 시절을 신앙으로 잘 극복하여 모두 아름드리나무들이 된 이 가정은, 이제 ‘믿음의 숲’을 이루고 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세상을 푸르고 아름답게 만들고 싶은 꿈을 위해 조 전 청장은 오늘도 주님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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