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으로 닭 튀기며 ‘사랑’ 배달하는 통닭집 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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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으로 닭 튀기며 ‘사랑’ 배달하는 통닭집 사장님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6.03.30 16: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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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미통닭 대표 조학래 집사

동네 교인들 몇이 모여 재능기부를 시작한 게 경기도 이천시 전체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경기도 이천시 창전동 ‘진미통닭’ 주인 조학래 집사(시온성교회 출석)는 지난 2006년, 같은 교회 교우들 몇 명과 무릎을 맞댔다.

이 자리에서 동네 어려운 이들에게 자신들이 가진 재능 기부를 통해서 희망을 주자는 뜻이 모였다. 이 모임을 주선한 조 집사는 치킨 배달을 다니면서 마음 아플 때가 많았다. 돈을 받기가 민망할 정도로 가난한 집들이 있었다.

치킨만 주고 돌아오는 일이 잦아지면서, 조 집사는 혼자만 해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교회 교우들을 만나 이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모두들 기꺼이 재능기부에 동참하겠다고 나섰다.

▲ 자신도 가난한 시절을 겪어 어려운 이들을 돕는 게 행복한 조학래 집사는 교우들과 함께 시작한 재능기부 운동이 이천시 곳곳에 퍼져나가는 기쁨을 맛보고 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말을 후렴구처럼 달고 사는 그는 간증거리가 참 많다.

달랑 10만원으로 시작한 통닭집
“세탁소 하시는 유화열 장로님, 정홍도 장로님, 이발하시는 강석수 장로님, 미용실 하시는 정복점 권사님 등등, 많은 분들이 뜻을 모아 동사무소를 찾아갔어요. 관내 어려운 이들을 소개해주시면 우리가 가진 재능으로 돕겠다고요.”

이런 소식을 알게 된 이천시장은 이같은 운동을 다른 동에도 확산시켰다. 시민과 동사무소가 협력한 ‘행복한 동행’은 교회를 넘어서 지역 내 다양한 업종의 이웃들까지 참여하면서 더욱 널리 퍼져갔다.

나중에 250개 업체로 확산된 이 운동은 참여자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원칙 덕분에 더욱 효과를 보았다. 재능기부가 어려운 이들은 1인1계좌 후원에 참여했는데, 이 역시 큰돈보다는 소액기부를 권장한 덕분에 더 많은 참여를 이끌어냈다.

조 집사 역시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를 쌀이 없어 따뜻한 밥 한 끼 지어드리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성남에서 통신부품 제조업을 하다가 IMF로 도산했던 때였다.

갈 곳이 없었다. 터덜터덜 처가가 있는 이천으로 내려왔다. 빈손으로는 터를 잡기 어려웠다. 대리운전을 비롯해서 몇 가지 해봤지만 아이들과 함께 밥 먹고 살기 힘들었다.

통닭집을 하는 처가 쪽 식구들의 도움으로 그 기술을 좀 배웠다. 그러나 역시 돈이 원수였다. 늘 돈 빌려오느라 고생 고생했던 아내는 또 한 번 10만원을 어디서 꿔왔다. 그 돈을 품고 지금 가게자리 건물 주인을 찾아갔다. 1층 네 칸 중에서 마침 한 칸이 비어있었다. 사정사정했다.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20만 원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10만 원 밖에 없잖아요. 일단 쓰게 해주시면 3개월 안에 갚겠다고 했죠. 며칠을 찾아갔습니다. 한번 믿어보겠다고 하더군요.”

산을 하나 넘었더니 또 있었다. 페인트도 칠해야 하고, 기계도 사야하고, 탁자도 필요했다. 가진 건 없었다. 가까이 있는 인력시장에 나갔다. 체격이 작은 그는 ‘노가다’로 잘 팔리지 않았다. 운이 좋은 날은 일하고 7만원을 받았다. 수수료 떼면 6만3천 원. 3만 원 아내에게 생활비로 주고, 3만 원으로 하나 둘씩 가게를 채웠다.

주일 지키면서 장사가 더 잘돼
“그 와중에 어느 날 가게 앞에 교회 집사님이 지나가시다가 저를 본 겁니다. 인력시장 총무로 잠시 계셨던 분이라 안면이 있는데, 저를 보시더니, 교회 나오시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이 싫지 않았어요. 그전엔 교회 나오라고 하면 완강히 반박하고, 차라리 내 주먹을 믿는다고 거부했거든요.”

사업이 어려울 때면 삼재가 끼었다고, 어머니가 구해준 부적을 속옷과 지갑에 넣고 다니던 그였다. 그런데 그날은 신기했다. 교회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계속 다닐 수가 없었다. 일요일 날 그나마 장사가 좀 되는데, 문을 닫는게 쉽지 않았다.

“주일이면 장사는 하지만 재미가 없더라고요. 남들은 다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데, 저는 그게 너무 부러운 거예요. 돈 번 다음에 가야지, 하면서도요. 그런데 어느 날 이런 맘이 들었어요.”

‘내가 지금까지 내 힘을 된 건 하나도 없지 않나? 내 힘으로 사업한다고 했지만 망했고, 도통 이루어진 게 없잖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지금 내 모습을 보실 거 아닌가? 그러면 문 닫고 가자. 교회 가자.’

‘주일은 쉽니다’라는 표지를 가게 앞에 붙였다. 주변에서 미쳤다고 수군거렸다. 장사한지 얼마 안되는데 벌써 배가 불렀다느니, 보니까 장사가 잘되는 것도 아닌데 미쳤다느니, 이런 이야기가 들려왔다. 상관없었다. 그는 꿋꿋이 교회를 다녔다. 행복했다.

“어느 날 매출을 정리해보니까요, 주일 4일을 쉬었는데요, 한 달 30일 일한 것보다 매출이 더 많은 거예요. 하나님은 살아계시더라고요.”

나중엔 무당집이 뒤편 가게로 들어왔다. ‘영적 전쟁’이 시작됐다. 푸닥거리 소리가 벽을 때렸다. 그는 기도로 맞섰다. 무당의 붉은 깃발이 춤출 때마다 하나님을 찾았다. 이 싸움은 어느 날 무당집이 이사를 가면서 승리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또 다른 무당이 들어왔다.

“그 사람을 찾아가서 이야기했죠. 나 봐라, 당신보다 더 어려웠는데, 이렇게 좋아졌다. 그거 백날 해도 안된다. 하나님을 믿어라. 그랬더니, 그게 귀찮았는지, 또 떠났어요. 그래서 이번엔 안되겠다 싶어, 그 한 칸을 더 얻었죠. 그런데, 또 그만큼 가게 세 부담할 수 있는 여력을 하나님이 주시더라고요.”

현재 그는 20평 가게를 다 사용하고 있다. 달랑 10만원 가지고 빌고 빌어 5평짜리 한 칸으로 시작했던 그는 지금 그 네 칸을 다 터서 사용하고 있다. 사람들마다 ‘이건 기적’이라는 반응이다.

▲ 닭을 손질하고 있는 조학래 집사.

등록금 헌금 후 복받은 자녀들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 누가 봐도 거긴 통닭집이 안된다는 반응이었다. 우범지대 같은 후미진 골목에 광고할 여력마저 없었으니. 기적 같은 일들은 그의 자녀들을 통해서도 일어나고 있다.

“큰 딸이 지금 고려대학교 생명공학과 석사과정 중에 있어요. 둘째는 한국교통대를 다니고 있고요. 지금까지 계속 장학금 받고 다녔어요. 자기들이 학비를 다 알아서 충당하고요, 저는 그저 책값이나 조금 줍니다. 이런 복을 받은 이유가 있어요. 두 아이가 고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입니다.”

그때 조 집사는 성가대석에 앉아있었다. 교회 목사님이 필리핀 선교센터를 건립 중인데 재정이 부족하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마침 두 아이 등록금과 식대로 쓸 100만 원을 아내가 빌려온 걸 알았다.

아내에게 그걸 바치자고 말을 꺼냈다. 절반의 타협도 거부했다. 모두 드리자고 했다. 갈등이 이어졌다. 결국 두 부부는 피 같은 눈물을 흘리며 그 돈을 헌금으로 드렸다. 그 등록금의 주인이었던 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로 잘 자랐다.

아직 집이 없어 전세로 살지만 이웃을 돕는 마음만은 늘 부자인 그는 인터뷰 내내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라는 말을 후렴구처럼 반복했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렵고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그의 통닭을 사랑해주는 고객들이 항상 고맙다.

“매일 좋은 새 기름을 씁니다. 그래서 기름 갈기 어려운 사각 튀김 솥을 안 쓰고 가마솥을 쓰고 있는 거죠. 또 매일 양질의 생닭을 받아쓰고요. 닭도 큰 닭이죠. 서민들의 간식인데 양이 많아야죠.”

이렇게 ‘정직’으로 닭을 튀기니, 맛이 없을 리 없다. 인터뷰를 마치고 ‘진미통닭’을 나오는데, 입구에 가마솥이 다시 보였다. 솥 안 식용유가 백두산 천지 물처럼 맑았다. 막 배달된 생닭을 정리하는 집사님과 작별하며 돌아서는 마음이 아쉬웠다. 아직 오전이라 닭 맛을 못보고 떠나는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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