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민족의 용서와 화해, 평화 실천에 앞장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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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민족의 용서와 화해, 평화 실천에 앞장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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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1.19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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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주 사무총장 /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독인연대

새해 벽두부터 몰아닥친 북한의 4차 핵실험 폭풍은 기독교계의 통일 환경에 어느 때보다도 강한 충격을 주고 있다. 작년 한 해 한국교회는 분단 70주년을 기리며 대형집회와 전문가포럼, 기도회 등을 열면서 평화통일을 기도해왔기 때문이다. 각박해지는 삶 속에서 꺼져가는 등불 같았던 통일에 대한 관심이 교계 내에서나마 잠시 반짝였는데 불꽃이 채 확산되기도 전에 된 서리를 맞은 격이다. 한국교회는 이제 새로운 도전 앞에 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통일을 감당할 수 있는지 시험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분단 이후 한국교회는 시대마다 중요한 소명을 감당해왔다. 보수적인 교회는 개인구원에 관심을 갖고 개인전도와 교회 설립에 충성을 다했다. 진보적인 교회는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일에 관심을 갖고 노동자와 농민, 도시 빈민을 위한 사역에 투신했다. 민주화 투쟁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이념적인 공격과 탄압을 받게 되자 인권과 민주화는 분단구조 해소와 더불어 꽃필 수 있다고 믿으며 통일운동에 나섰다. 보수와 진보 교회가 손을 맞잡게 된 계기는 북한 동포를 위한 지원이었다. 20년 넘는 대북지원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북한의 식량난과 북한 민주화 문제로 의견이 상충되기도 하지만 이는 선교현장의 차이로 인한 방법론적 한계일 뿐 보수와 진보 교회의 대립은 아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북한을 놓고 남남갈등이 격화되어왔다. 대북정책에 대한 평가도 정파적인 이해에 따라 출렁거렸다. 햇볕정책은 북한의 핵개발과 맞물리며 ‘퍼주었더니 핵으로 돌아왔다’는 질타 속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북핵문제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북한과 미국이 벌이는 생존게임이 본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은 국내정치에 아낌없이 활용했고 한국교회 역시 흔들렸다. 이번 4차 핵실험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의 ‘전략적 인내’ 정책은 북한을 통제·관리하지 못했고 오히려 시간을 벌어준 꼴이 되었다. 한마디로 미국의 대북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한미동맹의 틀에서 정책을 입안했던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도 실패다. 북한은 우리가 ‘퍼’주거나 말거나 자신들의 체제생존이 급할 뿐이다. ‘중국역할론’으로 책임을 떠넘기려는 태도는 넌센스(non-sense)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미국에 이어 중국에 맡기려는 소아병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이제 새로운 시대적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 우선 남북 분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들을 분별해서 꾸짖는 역할을 해야 한다.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허수아비 인형처럼 행동해선 안 된다. 민족화합을 추구하며 북한을 상대하기 전 남남화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좌우 이념갈등으로 분요한 한국사회 속에서 복음의 본질인 용서와 화해, 평화를 실천하며 앞장서야 한다. 또한 한국교회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처럼(롬5:8) 북한을 향하여 하나님 사랑을 증거하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 핵과 인권문제로 국제적 악명을 떨치고 있는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로 거듭날 수 있도록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

정전협정 전환과 북미수교는 오래된 북한의 요청이었다. 2006년 부시 대통령과 2009년 힐러리 국무장관은 이 문제를 우리 정부와 논의했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주도하여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가동시킬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번번이 놓쳤다. 사회적으로 보수적 토대를 갖는 한국교회가 나서야할 때이다. 북한의 체제안정을 담보하며 개혁개방을 돕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북에서도 비취게 하는 일이며 지하에서 기도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의 기도에 응답하는 일이다. 올 한 해 한국교회 통일 선교전략이 새롭게 마련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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